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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Sep 05. 2024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누가 알았을까 1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건물의 토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가 동상에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곤 했다. 그래도 그 조그만 방은 글을 쓸 수 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 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으로 개구리들이 뛰어 들어와 꽥꽥 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선생이 1967년부터 1982년까지 살았던 시골교회의 문간방 생활을 회상하면서 쓴 글이다.



스스로의 삶으로 사람들에게 강아지똥도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권정생은 1937년 9월 10일 일본 도쿄의 혼마치에서 태어났다. 정생네 가족은 헌옷 장사를 하는 일본인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정생의 아버지는 청소를 하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했다. 그래도 하루에 세 끼 다 챙겨 먹는 날이 드물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지만 정생의 가족은 귀국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1946년 4월, 정생네 가족은 드디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가족들이 살고 있는 경상북도 안동을 떠나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정생은 1965년 서점에 취직했다. 서점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져 처음보다 힘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워낙 부실하게 먹고 잠도 부족한 탓에 과로한 뒤에는 끙끙 앓았다. 밤에 잠을 자려고 하면 느닷없이 기침이 터져 꼬박 날을 새울 때도 있었다. 한번은 기침이 나자 단순히 감기몸살이라고 생각했는데 며칠간 밥맛이 사라지고 열이 오르더니 결국 자리에 눕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늑막염에 폐결핵까지 겹쳐서 심각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대로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1957년 2월에 어머니가 찾아왔다. 정생은 어머니를 따라 안동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섯 마지기의 땅을 빌려 소작농을 하며 겨우 연명하고 있는 아버지는 부쩍 늙어 있었다. 누나들은 모두 다른 지역으로 시집을 갔고, 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줄곧 농사를 짓고 있었다.



마을에는 객지에서 고생하다 결핵이나 다른 병을 얻어 돌아온 사람이 많았다. 정생은 그들과 함께 읍내 보건소로 항생제를 타러 가고는 했다. 오십 리 길을 걸어서 찾아갔지만 약이 없어 허탕을 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약국에서 파는 약은 너무 비싸서 구입할 수 없었다. 약을 제때 먹지 못한 탓에 병세가 악화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 집 건너 한 사람씩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다 죽고 이제 마을에 남은 환자는 정생뿐이었다. 하지만 정생의 병세도 나날이 악화되었다. 결핵균이 폐에서 신장, 방광으로 퍼졌다. 점점 소변을 보기가 어려워졌고 통증이 심해졌다. 나중에는 5분 간격으로 소변을 보느라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정생이 늦은 밤 변소에 갔다 방으로 들어가면 어머니의 방문이 조심스레 닫혔다. 변소에 들락거리다가 혹시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호롱불을 밝힌 채 방문을 열어두었던 것이다.



정생의 어머니는 원래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생명 가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던 어머니가 달라졌다. 산과 들에서 약초를 캐오고, 개구리나 뱀을 직접 잡아왔다. 정생의 몸에 좋다는 약재가 있으면 며칠이 걸리더라도 구해왔다. 또한 밤이면 몰래 뒤뜰에 있는 뽕나무 아래로 가서 기도했다.



어머니의 정성과 기도 덕분이었는지 죽기만을 기다리던 정생의 병이 차츰 호전되었다. 우선 소변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소변에 섞여 나오던 피고름도 잦아들고 통증도 완화되었다. 거기에다 교회의 교사로 임명되어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4년 겨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정생의 병은 다시 악화되었다. 각혈과 소변 횟수가 잦아졌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쉽게 차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동생 몰래 정생을 불렀다. 정생을 불러놓고도 묵묵히 바닥만 바라보던 아버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동생이라도 얼른 결혼시켜 대를 이어나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 집안을 위해서 일 년쯤 어디 좀 나가 있다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생은 1965년 4월 중순에 집을 나섰다. 동생에게 일주일쯤 기도원에 다녀올 테니 아버지를 잘 보살피며 지내라고 쓴 편지를 남겨 놓았다. 새벽 일찍 집을 나와서 점심때가 한참 지난 뒤에 대구에 있는 기도원에 도착했다. 일주일간 기도원에 있다가 나온 정생은 무작정 북쪽을 향해 걸었다. 집이 있는 쪽으로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배가 고프면 깡통을 내밀었고 밤에는 아무 곳에나 쓰러져 잤다. 정생이 점촌을 지나칠 때, 조그맣게 식당을 하는 아주머니는 잊지 못할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열흘 동안 매일 아침마다 찾아갔지만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정생의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주었다.



8월 초, 안동에서 가까운 예천에 도착했지만 아직 일 년이 지나지 않아서 집으로 갈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걸음을 옮기지 못할 정도로 아랫배가 아팠다. 죽더라도 아버지와 동생의 얼굴을 보고 죽으려고 집을 향해 걸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뒤 집에 도착했다. 한밤중인데 사랑방에 불이 켜져 있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버지가 산송장처럼 누워 있었다. 아버지가 병들어 누워 계시는 모습을 보니 모두 끝장이 난 것만 같았다. 결국 정생은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동생이 정생을 아버지 곁에 눕히고는 부엌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동생이 쑤어온 밀가루죽을 받아먹고 정생은 조금 정신을 차렸다. 가까스로 일어나 앉은 아버지는 벽을 보고 소리 없이 울었다. 아버지의 울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아버지는 방문과 창문을 닫은 채 꼼짝 않고 누워만 지냈다.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서야 아버지는 겨우 거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동생은 1966년 봄에 마침내 결혼해서 분가했다. 혼자 남겨진 정생은 5월에 또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입원했다. 의사는 더 이상 방치하면 생명까지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신장 하나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12월에는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남은 신장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 고무호스를 삽입해 소변을 받아내야만 했다. 옆구리에 찬 소변주머니에 소변이 차면 수시로 비워주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로웠지만 그런 대로 참을 만했다. 그런데 먹는 것 잘 먹고 약도 잘 챙겨 먹으면 2년 정도는 살 수 있겠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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