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물은 사방의 못마다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에 걸려 있네
가을 달빛은 온 세상을 환히 밝히고
겨울 산마루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다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峯)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 도연명, <사시(四時)>
중국의 전원시인 도연명은 이 시에서 사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시인이 봄물과 여름 구름, 가을 달빛에 이어 주목한 경치는 겨울 산마루에 외로이 서 있는 소나무의 모습이다. 추운 겨울에도 홀로 푸르른 소나무는 선비의 굳은 절개를 상징한다. 따라서 외로운 소나무는 세상의 상태와 형편에 휩쓸리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도연명 자신이다.
우리나라에서 외로운 소나무를 가장 인상 깊게 표현한 예술작품은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이다.
김정희가 1844년에 그려 이상적에게 주었던 세한도는 1932년 일본인 후지츠카 치카시가 소장하고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그는 김정희를 연구하며 자료를 수집했고, 1943년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김정희를 우러러 사모했던 서예가 손재형은 1944년 거금을 들고 후지츠카가 살고 있는 도쿄로 갔다. 손재형은 매일 후지츠카를 찾아가 “세한도는 조선 땅에 있어야 한다”고 애원했다. 후지츠카는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처음으로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이다. 비록 일본 사람이지만 조선 사람 못지않게 추사 김정희를 흠모했던 후지츠카는 손재형의 부탁을 번번이 거절했다. 손재형은 100여 일 동안 날마다 후지츠카를 찾아갔고, 엎드린 채 눈물 흘리며 세한도를 팔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런 모습에 감명 받은 후지츠카는 결국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넘겨주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945년 3월 미군의 공습으로 세한도를 비롯한 여러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있었던 후지츠카 연구소가 불에 타버렸다. 손재형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한국 미술사에 길이 남을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화로 꼽히는 ‘세한도’는 영영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세한도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60여 년이 지난 2006년,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그동안 소장해온 부친의 자료를 경기도 과천시에 무상으로 기증한다. 그때까지 아키나오는 아버지가 모은 책과 추사 관련 자료를 조선의 정신이 담긴 문화재라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기증 자료는 추사 친필 26점, 청나라 학자와 교환한 서화 70여 점, 경학 자료 2,500책, 후지츠카가 정리한 원고와 사진 1,000여 점이다. 아키나오는 돈을 요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추사 연구에 써달라고 연구비로 2,000만 원을 내놓기까지 하였다. 여기에 후지츠카 집안의 고문서와 서적, 영화 필름까지 딸려 보냈다.
2006년 12월 12일 최종수 과천문화원장은 이틀 전 추사 관련 자료를 기증하겠다고 약속한 아키나오를 다시 만났다. 그 자리에서 최종수 원장이 아키나오에게 “이렇게 선뜻 귀한 자료를 내놓는 이유가 무엇인지요?”라고 물었다. 이에 아키나오는 “조선시대 학자들은 청나라 학자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책과 학문을 받아들였지요. 그런데 일본은 완력을 이용해 책을 사오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있습니다. 책과 자료는 필요한 쪽에 있어야 하며 활용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라고 답했다.(이상국, <어느 일본인의 무덤 앞에서 12년째 오열하는 한국인>)
추사 김정희는 1786년 6월 3일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아버지는 훗날 판서를 지낸 김노경이다. 순조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수렴청정을 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김정희의 12촌 대고모이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외척인 경주 김씨 가문은 정치세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후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집안이 세력을 얻었을 때 김노경과 김정희는 잇따라 고난을 겪게 된다.
실학자 박제가는 신동답게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일찍 글을 깨쳤던 김정희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김정희는 스승 박제가로부터 청나라 북경의 발달한 문명과 학자들의 왕성한 학예활동에 대해 듣고 이를 동경했다. 김정희는 언젠가는 북경에 꼭 다녀오고 싶다는 마음을 시로 읊었다.
홀연히 각별한 생각이 일어나니
넓은 세상에서 지기를 맺고 싶어라.
마음 맞는 사람을 얻기만 하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네.
북경에는 명사가 많기도 하다니
부러운 마음 저절로 끝이 없구나.
- 유홍준,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에서
1801년 네 번째로 북경을 방문한 박제가는 청나라 학자 조강에게 제자가 지었다고 자랑하며 이 시를 보여주었다.
1808년 김정희는 드디어 북경으로 갈 기회를 얻었다. 청나라에 가는 사신으로 뽑힌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김정희가 북경에 가서 제일 먼저 만난 학자는 박제가가 보여준 시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조강이었다. 김정희는 조강과 교류하던 사람들을 통해 청나라의 대학자인 완원과 금석학의 일인자인 옹방강을 만나게 된다.
김정희는 스승 박제가의 책상에서 완원의 초상을 본 적이 있어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완원 역시 김정희가 비범한 인물임을 곧바로 알아보고 반가워서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왔다고 한다. 두 사람은 사제 관계를 맺었고, 김정희는 완원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세워 자신의 아호를 완당이라 했다. 완당은 추사를 비롯한 김정희의 100여 가지 호 가운데 하나이다.
김정희는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의 높은 학문과 예술을 익히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 필담을 나눌 때 옹방강은 김정희의 박식과 총명을 칭찬했다. 옹방강은 김정희가 귀국한 후 자료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가르침을 주었다. 후지츠카 치카시는 마음이 통했던 김정희와 완원의 만남이야말로 한중 문화 교류사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일이라고 평했다.
당시 청나라의 중심 학문은 옛 문헌을 정밀하게 실증하는 고증학이었다. 고증학의 기초가 되는 금석학은 비석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북경을 방문했을 때 완원, 옹방강에게 고증학과 금석학을 배운 김정희는 귀국한 후 우리나라의 옛 비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816년 7월, 31세의 김정희는 벗 김동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랐다. 여러 차례 탁본을 떠서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 북한산 비석이 6세기에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를 정한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1819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평탄하게 출셋길을 걷고 있던 김정희는 1830년 큰 위기를 마주하게 된다. 아버지 김노경이 안동 김씨 세력의 모함으로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된 것이다. 이때 김노경은 65세, 김정희는 45세였다.
이상적은 유능한 역관이면서 임금 헌종이 그의 시를 즐겨 읊을 만큼 출중한 시인이었다. 그는 중국 친구들이 앞장서서 문집을 내주는 인재였는데도 김정희에게 항상 머리 숙이며 가르침을 청했다. 김노경이 고금도로 귀양을 갔던 1830년 겨울. 이상적은 부친이 귀양 가서 상심해 있던 김정희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다. 자칫하면 권력자들이 제거하려는 인물의 가족과 엮여서 위험해질 수도 있는 발길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