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행성인 지구에서 가장 앙숙에 가까운 스포츠 라이벌은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이다. 다민족 국가인 스페인의 프로축구리그에 속해 있는 두 팀 사이에는 내전과 독재로 얼룩진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1899년, 레알 마드리드보다 3년 앞서 창단된 FC 바르셀로나(이하 바르셀로나)는 빠르게 카탈루냐 지방을 대표하는 클럽으로 성장했다.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지닌 카탈루냐족의 독립을 원하던 바르셀로나 축구팬들은 1925년 벌어진 친선 경기에서 스페인 국가가 나올 때 야유했다. 이 일로 관련자들이 감옥에 가거나 6개월간 축구장 출입을 금지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1936년 7월 17일, 스페인의 식민지인 모로코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민주공화정을 뒤엎으려고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은 8월 6일 모로코에서 스페인 본토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이 상륙작전에는 독재 국가인 독일, 이탈리아의 해군과 공군이 전면적으로 협력했다. 이날 FC 바르셀로나의 회장으로서 반란군을 반대했던 주제프 수뇰이 전선 지역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프랑코 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한다.
그해 10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명령으로 독일군 1만 명, 이탈리아군 5만 명이 스페인에 파견되어 프랑코 군대와 합세했다. 이에 맞서서 스페인 공화국을 도와준 것은 국제의용군이었다. 프랑스인 1만 명, 독일인 5000명, 이탈리아인 3300명, 미국인 2800명, 영국인 2000명, 기타 50여 나라에서 9200명의 민간 의용군이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찾아왔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앙드레 말로의 《희망》,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등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체험을 바탕으로 쓴 문학작품이다. 국제의용군이 스페인 정규군, 민병대와 함께 프랑코 반란군에 맞서 싸우는 것은 전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바스크는 스페인의 북부와 프랑스의 남부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베레모는 바스크 사람들이 즐겨 쓰는 모자이다. 카탈루냐족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간직한 바스크족은 스페인 정부에 자치를 요구했다. 스페인 정부는 1936년 10월 바스크의 자치를 지지하고 자치정부를 승인하는 방침을 밝혔다. 그 이후 바스크에서는 자치를 인정한 스페인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프랑코 군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의 비행기들이 바스크 지방에 있는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약 세 시간에 걸친 공격으로 인구 7,000명 중에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당했다. 스페인 태생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는 이 참상에 대한 충격과 분노로 ‘게르니카’라고 제목 붙인 벽화를 그렸다.
1936년 프랑코가 일으킨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1939년 반란군이 승리하여 막을 내리게 된다. 프랑코 군대는 격렬하게 저항했던 카탈루냐 지역을 점령하고 카탈루냐 언어와 국기 사용을 금지한다. 우리나라가 처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일제가 조선어와 태극기 사용을 금지한 것과 비슷하다.
프랑코는 축구 클럽 명칭에 외국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명령도 내렸다. 바르셀로나는 영국식 이름이었던 FC 바르셀로나(Futbol Club Barselona)를 쓸 수 없었다. 그 대신 73~74시즌까지 사용한 명칭은 CF 바르셀로나(Club de Futbol Barselona)였다.
프랑코 독재정권은 예전부터 독립을 요구해온 소수 민족들의 자긍심을 억누르기 위해 축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프랑코가 응원하고 지원하여 다른 민족들의 축구 클럽을 압도할 수 있도록 도와준 팀이 바로 레알 마드리드이다. 프랑코 정부와 스페인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레알 마드리드는 유럽 최정상 클럽으로 도약한다.
1939년 끝난 스페인 내전은 군사독재 치하에서 축구 전쟁으로 이어진다. 프랑코에 반대하는 스페인 국민들은 레알 마드리드를 적으로 여기며 자신들의 연고지 팀을 응원한다. 특히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는 경기할 때마다 가장 살벌하게 전투를 벌이는 라이벌이 된다.
프랑코는 FC 바르셀로나의 2대 회장인 주제프 수뇰을 살해한 데다가 바르셀로나가 좋은 선수를 데려오지 못하게 방해한다. 게다가 경기에 직접 개입하여 승패를 뒤집어 버리는 공작도 서슴없이 자행한다.
1943년 코파 델 레이(국왕컵) 준결승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는 레알 마드리드에 3-1로 승리하여 결승전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으로 자리를 옮겨 2차전 경기를 준비하던 바르셀로나 선수들에게 프랑코가 보낸 요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2차전에서 큰 점수 차로 패하라고 요구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프랑코 정권을 상징하는 축구 클럽이었고,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불과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프랑코는 거세게 저항했던 카탈루냐 지역을 대표하는 바르셀로나에 밀려 레알 마드리드가 결승에도 오르지 못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독재정권의 협박으로 선수들이 생명에 위협을 느낀 바르셀로나는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결국 1-11로 패배한다.
이처럼 프랑코는 레알 마드리드가 유리하도록 골문도 움직이는 운동장을 만들었다. 1939년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 프랑코가 1975년 사망하여 ‘FC 바르셀로나’라는 이름을 되찾을 때까지 무려 37년 동안 바르셀로나의 축구공은 둥글지 않았다.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스페인에 봄이 찾아오면서 그 공은 비로소 둥글게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5년 뒤 바르셀로나는 축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와 계약한다.
2000년 바르셀로나는 빼어난 실력을 지닌 13세 메시와 만났다. 일찍이 메시의 재능을 눈여겨 보았던 카를레스 렉사흐 바르셀로나 기술이사는 메시의 플레이를 보자마자 매료되어 계약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가 열세 살의 외국 유소년 선수와 계약해본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계약과 관련한 확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어영부영 두 달이 흘렀고 참다못한 메시의 아버지 호르메 메시가 다른 팀을 알아보겠다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다급해진 렉사흐는 부랴부랴 메시와 계약했다. 이 계약은 바르셀로나는 물론 ‘축구의 신’ 메시의 운명을 바꾸었다. 메시는 2004년부터 2021년까지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778경기에 나서 672골을 터뜨렸다. 스페인 라리가(프로축구리그) 10회를 비롯해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4회, 코파 델 레이 7회 등 모두 35차례 우승했다. 그렇게 메시와 함께 FC 바르셀로나는 하늘로 축구공을 쏘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