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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Aug 21. 2024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사람 2

하버드대학의 연구팀이 연구 참가자들한테 질문하는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분을 웃게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고 싶을 때 누구에게 연락하는가?


느긋하고 연결된 느낌을 주며,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를 웃게 만들고, 같이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고 싶은 사람. 느긋하고 연결된 느낌을 주며,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



하버드대학 성인발달 연구팀의 책임자 로버트 월딩거는 2023년에 부책임자 마크 슐츠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긴 행복 탐구 보고서》를 펴냈다. 다음과 같은 문장에 이 책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인간관계는 우리 내면에 살고 있다.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떠올리기만 해도 각종 호르몬과 화학 물질이 생성되고 그것이 혈액을 타고 이동해 심장과 뇌, 다른 신체 기관들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효과는 평생 지속된다.”(로버트 월딩거․마크 슐츠, 《세상에서 가장 긴 행복 탐구 보고서》)



과학은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단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좋은 인간관계를 택하라고 알려준다.



하버드대학 성인발달 연구에 따르면 지금 여기, 현재의 순간에 충실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좋은 인생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저 멀리에 있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웹툰 <도무지 그 애는>의 주인공 도무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지 못해 여러 가지 알바를 했다. 그러다가 중형 마트에서 시식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한다. 무지는 온갖 쓰레기를 주워서 집으로 가져오는 엄마와 단둘이 산다. 무지가 어렸을 때 엄마와 같이 외출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난쟁이랑 난쟁이 딸이 간다”며 수근거렸다. 무지가 밖에 나가 있을 때 엄마는 불쑥불쑥 전화해서 집에 언제 오냐고 물어본다. 무지는 가끔 ‘나보다 불행한 부모가 있다는 건 일종의 저주가 아닐까. 내가 누리는 모든 것에 죄책감을 묻혀서 온전히 입을 수도 먹을 수도 즐길 수도 없게 한다’고 생각한다.



무지가 일하는 마트에 일곱 살짜리 꼬마가 매일 찾아온다. 마트에서 청소 도우미로 일했던 꼬마의 엄마는 갑자기 집을 나갔다. 술주정뱅이 아빠는 꼬마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가던 무지는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채 걸어가고 있는 꼬마를 보았다. 무지는 양말을 벗어서 꼬마의 한쪽 발에 신겨주고 신발 가게로 데려갔다. 무지는 꼬마에게 5,000원짜리 슬리퍼를 사서 신게 한 다음에 가자고 다. 하지만 꼬마는 가만히 서서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빤히 쳐다본다. 식당에서 제일 싼 음식을 고를 때가 많은 무지는 3만 원짜리 운동화를 사서 꼬마에게 주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난 무지는 마트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 도움받는 사람뿐 아니라 돕는 사람에게도 이익이 된다. 관대함과 행복 사이에는 신경 연결고리와 실제 연결고리가 있다. 관대한 태도를 취하면 뇌가 좋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미국 정신과 의사 칼 메닝거는 “사랑은 사람들을 치유해준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이라고 했다.



도무지는 마트에서 한 달 동안 단기 알바를 할 때 매출을 많이 올려서 정직원이 된다. 2년 전부터 마트에서 일하고 있었던 천광식은 무지와 스물아홉 살 동갑내기다. 무지가 신발을 사준 후에 이름을 알게 된 일곱 살짜리 꼬마 유찬이는 광식을 형이라 부르는 친구라고 했다. 무지는 엄마가 그리워 날마다 마트에 찾아오는 유찬이와 스스럼없이 놀아주는 광식을 보면서 두 사람이 친척일 거라고 짐작했었다. 광식은 무지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뒤에서 도와준 적이 있었다. 광식이 내색하지 않아 뒤늦게 알게 된 무지는 ‘내가 몰랐던 순간조차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광식은 같은 직장에 다니고 같은 동네에 사는 무지와 가깝고 친한 사이가 된다.



무지는 대학에 다닐 때 냉면집에서 알바를 했다. 무지네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냉면집 사장은 예정에 없는 보너스를 주거나 음식과 목도리 따위를 사서 무지 손에 들려주곤 했었다. 무지는 마트에 시식일을 하러 온 사장을 10년 만에 만났다. 무지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 순간을 어떻게든 살게 해준 사람들. 어쩌면 그 덕에 지금껏 살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떠내려가지 않고 죽지 않고 기어코’라고 생각했다. 퇴근하고 사장을 찾아간 무지는 선물세트를 건넨다. 무지는 선물세트 안에 상품권 몇 장과 함께 편지를 넣어 두었다. 무지와 헤어진 뒤 사장이 편지를 읽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니, 이모!


오늘 오랜만에 뵈어서 너무 반갑고 기뻤어요.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제가 얼마나 운이 좋은 아이였는지 오늘 알았네요. 살면서 단 한 명, 단 한 명의 어른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도요. 10년 전, 제 삶의 한 켠에 계셔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말로는 다할 수 없지만, 그때 저를 살리셨어요.”(게코․시노키오, 《도무지 그 애는》)



무지는 광식을 비롯해 서로에게 온정을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일터에서 좋은 에너지를 얻는다. 도무지에게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그 덕분에 삶이 좀 더 활기차지고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모든 것에는 금이 가 있다. 빛은 바로 거기로 들어온다.”

- 레너드 코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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