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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Sep 25. 2024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잠 못 들게 하는 사나이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속의 눈

천년 역사에다 당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문정희,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 기원전 145년에 태어난 사마천은 중국 한나라 무제 때의 역사가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으로 복무했다. 태사령이란 역사, 천문, 역법 등등의 기록과 저술을 맡았던 관직이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 했던 사마천은 모든 고문서를 읽었고 역사와 야사에 능통했다. 사마담은 어린 사마천을 데리고 중국 각지를 여행했다. 그 덕분에 사마천은 수많은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보았다. 그가 36세 되던 해 아버지 사마담이 병에 걸려 죽었다. 사마담은 죽으면서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이 시작했던 역사서를 완성하라고 유언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기원전 99년, 한나라의 무제는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켰다. 원정군의 사령관은 이광리였고 대장군은 이릉이었다. 이릉은 5,000명의 결사대로 흉노군과 정면승부를 벌였다. 하지만 3만 명에 이르는 흉노군은 지형지물과 병력의 우세를 이용해 한나라 군대를 초토화시켰다. 이릉은 살아남은 병사 400명과 함께 포위되었다. 이릉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첫째, 옥쇄작전으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병사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둘째, 지금은 항복하고 나중에 다시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이릉은 흉노에게 항복하고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이것이 사마천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사건이 된다.



한나라 무제는 몹시 노했다. 모든 중신들을 모아 놓고 이릉을 성토했다. 이릉에게 벌을 주려는 무제의 뜻을 알아챈 중신들은 모두 이릉을 비난했다. 이릉은 하루아침에 명장에서 역적이 되었다. 무제는 이릉의 패전을 비난하는 한편 항복한 장군의 변절을 꾸짖으며 그의 가족을 능지처참하라 명령했다. 모든 중신들이 무제의 명을 받드는 순간 사마천이 나섰다.


“이릉은 충신입니다. 그의 충절은 이미 수많은 전투에서 증명되었습니다. 또한 대대로 이릉 집안은 한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명문가입니다. 이번 흉노 정벌에서는 병사 수가 부족해 흉노족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병사도 살리고 새로운 기회도 얻고자 거짓으로 항복했을 것입니다. 이릉의 마음을 정확히 알기 전에는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박기종, <궁형을 견뎌내고 역사와 인간을 기록한 ‘사마천’>)



사실 무제도 이릉의 충성심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벌군의 사령관인 이광리는 무제가 아끼는 후궁의 오빠였다. 이광리가 판단 미숙과 작전 실패에 따른 책임을 크게 져야 한다는 것을 무제와 중신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광리를 처벌할 수 없어 이릉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무제는 사마천을 감옥에 가두었다. 곧이어 이릉의 가족을 처형하고 사마천은 태사령에서 파면하고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는 사마천의 심경은 그야말로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올바른 일을 행하고 죽는 것도 억울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이자 자신의 숙원 사업인 역사서를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사마천이 사형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돈 50만 전을 내거나 생식기를 거세하는 궁형을 당하는 것이었다. 50만 전은 병력 5,000명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마천은 개인은 물론이고 가문의 치욕으로 여기는 궁형을 택했다. 사마천은 치욕을 당하더라도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훗날 사마천은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지금 남아 있는 천하의 모든 문서를 수집하여 왕조와 개인이 흥망성쇠하는 원리를 살펴 기록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초고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다. 나는 작업이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서 수치스러운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이다.”(박기종, <궁형을 견뎌내고 역사와 인간을 기록한 ‘사마천’>)



감옥에서 2년을 보낸 사마천은 기원전 97년 풀려났다. 그는 기원전 104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했던 역사서를 기원전 90년에 완성했다. 52만 6,500자에 중국 신화시대의 황제 때부터 한나라 무제 때까지 약 3,000년의 시간을 담아낸 역사서 《사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문정희 시인은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사마천의 발자국을 본다고 했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2천 년 후의 사람들도 존경하는 범려를 만날 수 있다.



중국 초나라에서 태어난 범려는 지인 문종과 함께 월나라로 가서 월왕 구천에게 중용된다. 기원전 496년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를 침공하였다. 오나라 군에 비해 절대 열세였던 월나라 군은 범려가 세운 계책대로 군사 작전을 감행한다. 범려는 결사대를 선발하여 오나라 진지로 출동시켰다. 오나라 진지에 도착한 결사대는 적군들의 눈앞에서 자결하였다. 이런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자 오나라의 진지에서는 모든 병사가 이 진기한 구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들이 자살부대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월나라 병사들이 오나라 군사들을 좌우에서 포위하고 공격했다. 기습 작전은 완전히 성공했다. 칼을 맞은 오왕 합려는 그날 밤, 10여 리를 후퇴한 장소에서 죽었다. 야사에서는 월나라의 결사대가 감옥에 갇혀 있던 사형수들이라고 전한다. 어차피 죽이기로 작정한 사내들을 전쟁터에 끌고 가서 병참의 보급이나 기타 위험한 일에 종사시켰다는 것이다.



죽은 합려의 아들 부차가 오나라 왕위를 물려받았다. 부차는 푹신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마구간과 섶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 자신이 출입할 때마다 시종들에게 “왕이시여, 아버지의 원수를 잊으셨습니까?”를 큰소리로 외치게 하였다. 하지만 부차는 서두르지 않았다. 군대를 증강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면서 나라의 부도 축적해 나갔다.



기원전 494년에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선제공격을 명령하였다. 이때 범려는 월왕 구천에게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으니 당장 중지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구천은 범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만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한 구천은 부차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대패하고 만다. 겨우 목숨만 건진 채 회계산으로 도망간 구천에게는 부상당한 병사 5,000여 명만 남아 있었다. 부차에게 포위당한 구천은 자결을 결심하지만 범려가 말린다.


“오왕 부차는 몇 년을 마구간에서 지내며 오늘을 맞이한 것입니다. 한 번 크게 졌다고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구천은 부차에게 항복하고 오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범려는 구천에게 청하여 자신도 인질로 간다. 구천과 범려는 날마다 땔나무를 패고, 말똥을 치우고, 마당을 쓸었다. 어느 날 부차가 병에 걸렸다. 범려는 뇌물을 써서 부차의 병명과 병세를 알아냈고, 곧 회복된다는 정보도 얻는다. 범려에게 한 가지 꾀를 들은 구천은 부차를 병문안한다. 그때 부차가 변을 보았다. 구천은 이 변을 손으로 찍어 맛보고 이렇게 말한다. “대왕의 변을 맛보니 곧 병이 나을 듯합니다.” 얼마 후 부차의 병은 다 나았고 부차는 구천의 행동을 되새기며 경계심을 풀기 시작한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부차는 구천과 범려를 월나라로 돌려보낸다.



기원전 491년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드나드는 문에 걸어둔 짐승의 쓸개를 맛보면서 오나라에 당한 수모를 잊지 않았다. 구천은 월나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과 함께 3년 동안 굴욕적인 생활을 버텨낸 범려에게 재상 직책을 내렸다. 그러나 범려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문종을 추천하였다. 범려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일 줄 알았다. 문종과 범려의 부국강병책으로 월나라는 점차 신흥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구천은 오나라에서 돌아온 지 4년째가 되는 해 어느 날 범려에게 물었다.


“이제 오나라를 정벌하여 지난날의 치욕을 씻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범려는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으니 더 기다려야 한다며 반대했다. 월나라로 돌아온 지 10년째 되던 기원전 482년, 범려는 이제 오나라를 정벌할 때가 되었다고 월왕 구천에게 알렸다.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월나라의 군사들은 빠른 속도로 오나라로 진군했다. 월나라 정예병은 오나라의 주요 거점을 장악했다. 부차는 월나라에 강화를 요청했고, 단숨에 월나라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판단한 구천도 이를 받아들였다. 기원전 478년에 월왕 구천은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왕 부차의 주력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월나라 왕 구천은 범려의 계책에 따라 3년여에 걸쳐 지루하고도 끈질긴 공격을 퍼부었다. 기원전 475년 월나라 군대는 오나라의 대부분을 점령하였고, 마지막으로 오왕 부차가 농성하는 오성을 포위하였다.



부차는 항복하면 작은 섬에서 편안하게 지내도록 해주겠다는 제안을 듣고 탄식하였다.


“한치의 강토도 차지하지 못하고 사직마저 계승하지 못하는 이 몸이 살아서 무엇하랴. 죽어서도 선왕을 만날 면목이 없구나.”



부차는 스스로 칼을 목에 찌르고 생을 마감하였다.



부차는 아버지 합려의 원한을 갚기 위해 섶나무 위에서 잤고, 구천은 쓸개를 핥아가며 복수를 다짐했다. 《사기》에 나오는 이 고사에서 ‘섶나무에 몸을 눕히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을 지닌 한자성어 '와신상담'이 유래했다. '와신상담'은 원수를 갚거나 마음먹은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범려를 상장군에 임명했다. 그러나 범려는 앞으로 왕이 크게 공을 세운 신하의 명성과 영향력을 경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천에게 상장군을 사임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구천이 허락하지 않자 범려는 가족을 데리고 몰래 월나라를 떠났다.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기 전에 동료 재상이었던 문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적국이 사라지면 책략을 내던 신하는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월나라 왕은 함께 고난을 견딜 수는 있어도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는 없는 인물입니다. 그대도 지금 떠나지 않으면 틀림없이 참혹한 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김준태, <세 번 자리를 옮기고도 모두 정점에 오른 춘추시대 범려>)



문종은 범려의 충고가 타당하다고 여겼지만 재상직을 내려놓을 수 없어 망설였다. 그러다 얼마 뒤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구천이 보낸 칼로 자결하였다.



신하로서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오른 순간 스스로 물러날 줄 알았던 범려.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게 되어 주인에게 삶아 먹히게 된다’는 뜻을 지닌 고사성어 ‘토사구팽’은 그가 문종에게 한 말에서 유래했다. 범려는 끈질기게 기다릴 때와 용감하게 나아갈 때와 지혜롭게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등을 쓴 대만 무협소설가 김용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범려를 꼽았다.



사마천은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길렀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역사가의 붓으로 세상을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에서 ‘기둥으로 끊어낼 수 없는 제 속의 눈’은 치욕스러운 궁형으로도 꺾을 수 없었던 사마천의 집념과 의지를 나타낸다. 그 뜨겁디뜨거운 제 속의 눈 덕분에 역사 속을 걸어나온 사마천과 범려는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잠 못 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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