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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Sep 23. 2024

남한과 북한의 가족을 이어준 북방쇠찌르레기

1997년 개봉한 영화 ‘아름다운 비행’에는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열세 살 소녀 에이미는 뉴질랜드에서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10년 만에 다시 만난 아빠 톰과 함께 캐나다로 돌아온다. 어릴 적 사진과 장난감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에이미는 자기가 태어난 집이 낯설게 느껴진다. 세 살 때 헤어진 아빠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에이미는 집 옆에 있는 늪에 갔다가 야생 거위알을 발견한다. 개발하려고 늪지대의 나무를 마구 자르는 바람에 늪에서 서식하던 거위들이 쫓겨나고 알만 댕그라니 남겨진 것이다.



에이미는 거위알을 가져다가 헛간에 두고 따스한 손길을 쏟는다. 며칠 뒤 알에서 깨어난 열여섯 마리의 거위들은 에이미를 어미새로 여긴다. 거위는 부화할 때 처음 본 걸 어미로 알고 따르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거위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정해 주고 마치 엄마 거위처럼 새끼 거위들을 정성껏 돌본다.



거위는 먹는 법, 나는 법, 이동하는 법 등 모든 걸 어미한테 배운다. 그런데 어미새가 없어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늦가을에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할 수가 없다. 철새인 야생거위가 제때에 이동하지 못할 경우 집에서 키워야 한다. 하지만 야생거위를 집에서 기르려면 날개를 잘라야 한다. 이를 어기는 것은 불법이라는 얘기를 들은 톰은 거위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톰은 먼저 거위가 양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모양처럼 생긴 경비행기를 만든다. 그다음 에이미에게 비행기를 조종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조종술을 다 익힌 에이미가 경비행기를 타고 이륙하자 거위들이 에이미를 따라 일제히 날아오른다. 에이미와 거위들은 4일 간의 비행을 마치고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800킬로미터 떨어진 미국의 해안 마을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다음해 봄, 열여섯 마리의 거위가 모두 에이미에게 돌아왔다.



‘아름다운 비행’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서 거위 소녀 에이미와 새끼 거위들이 노을이 지는 하늘을 줄지어 날아가는 장면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물아일체의 경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그 장면에서 에이미는 자신이 진짜 어미새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영화 주인공 에이미처럼 새를 보살피다가 감격스러운 일을 경험한 조류학자가 있다.



원홍구는 해방 이전에 조선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새를 연구한 학자였다. ‘새 박사’로 유명한 원병오는 1929년 원홍구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과 들로 새를 쫓아다녔다. 그 덕분에 소학교 다닐 적에 새 이름 150개 정도를 달달 외울 수 있었다. 집에 조류 표본 4,000여 점과 나비도감을 가득 쌓아 놓고 있었던 원홍구는 나비 이름도 곧잘 외우는 막내아들을 유난히 귀여워했다.



1940년 여름에 원홍구는 함경도 흥남평야에서 새를 관찰하다가 북방쇠찌르레기를 발견했다. 그전까지 북방쇠찌르레기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한반도를 거쳐서 시베리아나 만주에서 번식하는 새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북방쇠찌르레기가 오동나무 줄기에 구멍을 뚫어서 만든 둥지를 발견한 것이다. 원홍구는 그 사실을 세계 조류학회에 보고하였고, 새 둥지를 발견한 그의 얼굴과 이름이 신문에 나왔다.



원병오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영하여 12월 4일 첫째 형, 셋째 형과 함께 월남하였다(둘째 형은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사망하였다). 김일성대학 교수이면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이었던 아버지 원홍구와 어머니, 누나들은 북한에 남았다.



피난 시절에 원병오는 미국 학자가 쓴 《한국의 조류》라는 책에서 아버지의 연구 업적을 새삼 확인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새 연구를 결심한다. 그는 1956년 여름에 서울의 홍릉 임업시험장에서 북방쇠찌르레기를 발견했다. 당시에 그 새는 함경도나 평안도에 살 뿐이지 남한에는 살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원병오가 북방쇠찌르레기가 남한에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북방쇠찌르레기가 북한에 산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아버지이고, 남한에도 산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분단된 현실은 남쪽의 아들이 북쪽의 아버지를 만나서 이 소식을 알리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원병오는 1963년부터 철새들의 이동을 연구했다. 주로 하는 일은 새를 잡아서 발에다 가락지를 달아 주는 것이었다. 새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잡아야 했기 때문에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는 7년 동안 134종, 20만 마리의 새를 잡아서 가락지를 끼워 주었다. 그 안에는 북방쇠찌르레기도 들어 있었다.



초여름에 태어난 북방쇠찌르레기는 가을이 되면 남쪽으로 갔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찾아온다. 그런데 새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



원병오는 1965년 초여름에 일본 도쿄의 국제조류보호연맹 아시아 지부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여름 철새인 북방쇠찌르레기에 일제 알루미늄 가락지를 달아서 보낸 사실이 있는지 묻는 편지였다. 원병오는 그런 사실이 있다고 답장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는 가락지가 없어서 일본에서 가져다 썼다. 당연히 가락지에는 ‘JAPAN’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철새의 이동경로를 조사하던 원병오는 1963년 6월 6일 새끼 북방쇠찌르레기의 다리에 ‘JAPAN C7655’라고 적은 알루미늄 가락지를 끼워서 날려 보냈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 새는 2년 뒤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1965년 봄에 ‘C7655’는 평양 만수대 기슭의 숲속에서 발견돼 북한과학원 생물학연구소 소장이던 원홍구에게 보내진다. 그는 일본에 살지 않는 새의 다리에 달려 있는 일제 가락지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일본 조류학자들에게 문의했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원홍구에게 ‘C7655’는 남한의 조류학자 원병오가 보낸 새라고 알려 주었다. 두 사람은 일본 조류학자들의 도움으로 서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후 아들 원병오는 일본을 통해 아버지 원홍구에게 편지를 보낸다. 원홍구는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새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감격스러워한다. 원홍구, 원병오 부자는 이산가족 가운데 서로의 소식을 알게 된 첫 번째 가족이었다. 남북한의 부자 조류학자가 15년 만에 새를 통해 생사를 확인했다는 내용은 북한의 노동신문, 소련의 프라우다를 거쳐 미국과 일본의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북한 작가 임종상은 원홍구 가족의 이야기를 토대로 <쇠찌르레기> 라는 소설을 썼다. 1992년에는 북한과 일본이 합작하여 영화 <새>를 제작하였다. 북한 당국은 이들의 사연을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했고,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 <아들로부터 온 새>란 글을 실어 이 사연을 소개했다.



아버지 원홍구와 아들 원병오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꿈에도 잊지 못하던 막내아들 이름을 부르며 1970년 10월 3일 눈을 감았다. 아들은 일본 학자의 전보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북쪽을 향해 절하며 울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원병오의 어머니는 철새 다리에서 떼어낸 가락지를 어루만지며 흐느끼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부음은 사망하고 6년이 지난 뒤에야 국제학회에서 들을 수 있었다. 원병오는 애써 슬픔을 참아 내면서, 소식을 전해 준 북한의 동물학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알려 주어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처럼 남과 북을 오갈 수 있을까요?”(이상권, 《새를 보면 나도 날고 싶어》)



원병오는 1989년 김일성 주석의 초청장을 받았으나 우리 정부가 “북한의 정치선전에 이용될 수 있다”며 방북을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2002년 4월 방북한 독일의회 대표단을 통해 북측에 성묘와 학술 교류를 원하는 편지를 전달했고, 5월 17일 북한 동물학회의 초청장을 얻어냈다. 그는 방북에 앞서 “북한 대학에서 강의하고 남북한 학술 교류에도 기여하고 싶다”면서 “새들처럼 자유롭게 왕래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원병오는 2002년 6월 22일부터 7월 6일까지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과 원산농업대학, 평양 동물원, 부모 묘소가 있는 평양 애국열사릉 등을 둘러봤다. 그리고 평양에 살고 있는 조카들의 아파트에도 들러 정을 나누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남한의 낡은 아파트와 비슷했고 조카들은 생기발랄했지만 윤택하게 살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매달 쌀 한 가마라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방북 기간에 북한의 동물학연구소는 그에게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표본이라며 백두산 특산 조류인 멧닭 한 쌍을 선물했다. 그 표본은 지금 경희대 자연사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표본을 볼 때마다 아마 원병오는 남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가 부러웠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새 덕분에 부모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원병오는 살아생전에 고향에 가서 새를 연구하여 한반도의 자연을 하나로 완성하고 싶다는 숙원을 결국 이루지 못한 채 2020년 4월 9일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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