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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Sep 30. 2024

사람의 모습으로 잠시 우리 곁에 머물렀던 성자 2

2001년 6월 24일 의사 이태석은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사제서품식에는 어머니도 참석해 아들의 앞길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수단에 가서 살기로 결심한 최초의 한국인 신부 이태석은 2001년 11월 톤즈로 떠났다.



한낮의 기온이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수단은 전염병이 많은 곳이다. 딩카족이 사는 톤즈에는 말라리아와 콜레라, 결핵, 장티푸스 등의 병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 진흙과 대나무로 지은 세 칸짜리 움막과 달랑 침대 하나뿐인 진료소를 열었다. 그는 진료를 받기 위해 30~40킬로미터를 밤새도록 걸어와서 아침 일찍 진료소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환자들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료소에 올 수도 없을 만큼 중증이거나 깊은 숲속에 사는 환자들을 위해 1주일에 한두 번 80여 개의 마을로 이동진료를 나갔다.



영양 상태만 좋으면 쉽게 이길 수 있는 말라리아나 홍역으로 죽어가는 톤즈 사람들을 보며 이태석 신부는 병원을 짓기로 결심한다. 2004년 5월 진료실, 검사실, 입원실, 약 보관실이 있는 열두 칸짜리 병원이 완성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매일 새벽 다섯 시 45분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병원에서 매일 250명이 넘는 환자를 손수 돌봤다. 환자의 증상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딩카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톤즈에는 그를 만나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5일 동안 100킬로미터를 걸어온 아이와 아버지도 있었다. 밤에 찾아오는 환자는 여러 날을 걸어왔거나 총상을 입은 응급 환자들이다. 그는 한 번도 그들을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이태석 신부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다.



수단에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허술한 움막집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 가는 한센인들이 많았다. 톤즈에 있는 한센인 마을은 이태석 신부가 틈만 나면 들르던 곳이었다. 이태석 신부가 찾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죽어갔다. 이태석 신부는 건물 네 채를 지어서 한센인들이 모여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병의 진행을 막는 치료제도 구해주었다. 또한 버려진 땅에 나무를 베어내고 우물을 파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한센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외부 사람이기도 했다.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신경이 마비되어 손발에 날카로운 것이나 뜨거운 것이 닿아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살갗이 자주 찢어져 뼈가 드러나고, 고름이 터져서 악취가 났다. 이태석 신부는 맨손으로 한센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태석 신부가 고름을 짜고 붕대를 감아 주었지만 맨발로 다니는 한센인들의 몸은 늘 상처투성이였다. 상처 부위는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면 썩어서 잘라내야 한다. 이태석 신부는 그들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만들기 위해 한 사람씩 도화지에 발을 올려놓고 발 모양을 직접 그렸다. 그 그림을 케냐 나이로비에 보내 잘 닳지 않도록 가죽으로 샌들을 만들었다. 한센인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자신만의 신발이 생긴 것이다.



톤즈에 있던 학교는 2001년 9월에 북수단의 폭격을 맞아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학교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하루 종일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이태석 신부는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톤즈 주민들과 함께 골격만 남은 학교 건물을 보수해서 교실로 만들었다. 교사들은 케냐에서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선발해서 데려왔다. 톤즈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초중고 과정에 해당하는 12년 과정 정규학교가 세워졌다. 그는 진료가 없는 시간에는 고등학교 수학을 직접 가르쳤다.



2005년 1월 남수단과 북수단은 마침내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남수단 사람들에게는 꿈에도 그리워하던 평화였기에 축제가 몇 주간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재산목록 1호인 소를 둘러싼 부족 간의 충돌은 수단의 평화를 위협하는 불씨로 남아 있었다. 소와 관련된 문제로 가족이나 부족 중에 한 사람이 상처를 입거나 살해를 당하면 경찰과 군인들도 못 말릴 정도의 큰 싸움으로 번졌다.



남수단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건물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도 상처 받고 부서져 있었다. 이태석 신부는 상처 받은 아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씨앗을 심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이들에게 피리와 기타, 오르간을 가르치는 것이 많이 어려우리라 생각했지만 예상 밖으로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몇몇은 피리는 물론이고 기타를 배운 지 하루 이틀 만에 노래를 불러가며 제법 빠르게 기 시작했고, 일주일 만에 양손으로 오르간을 연주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2005년 남수단 최초로 트럼펫, 트롬본, 클라리넷 등의 악기들로 구성된 35인조 브라스밴드가 탄생했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의 등장은 남부 수단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중요한 행사를 치르는 장소에는 항상 그들이 있었다. 남수단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도 초청을 받았다. 대통령은 아이들의 연주를 보고 미국에서 온 밴드인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2008년 10월 이태석 신부는 2년 만에 휴가를 맞이하여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몸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껴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받았다. 정밀검사 결과 대장암 말기였지만 정작 그가 걱정한 것은 자신의 건강이 아니라 수단의 아이들이었다. 암 판정을 받은 이태석 신부는 “우물을 파다 말고 왔는데, 열흘 있다 수단에 가야 하는데…… 아이들이 기다리는데……” 하며 망연자실하였다. 살레시오회에서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아이들과 얘기하기를 좋아했던 이태석 신부는 2010년 1월 14일 새벽 다섯 시 35분에 선종했다. 2011년 1월 선종 1주기에 즈음하여 이태영 신부는 “가장 아름다울 때 데려가신 것은 그의 삶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2009년 12월 17일에 열린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 시상식에서 이태석 신부는 다음과 같이 수상 소감을 밝혔다.


“저는 전문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특별한 백신을 개발한 것도 아니고, 단지 내세울 것 없는 자그마한 의술로 병원이 없는 곳에서 원주민들과 몇 년 살았을 뿐인데…… 제 것도 아닌 상을 몰래 훔쳐가는 느낌에 죄책감마저 듭니다. 저는 진료하기 전 1~2분은 환자의 눈만 바라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의사와 환자의 만남 이전에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진실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질병 치료를 위한 단순한 만남이 아닌, 고귀한 영혼과 영혼의 만남으로 승화시키는 의사가 되시길 바랍니다.”(이지혜, <한미 자랑스러운 의사상 수상한 이태석 신부>)



2011년 2월, 이태석 신부가 떠난 후 브라스밴드를 이끌고 있는 제임스는 톤즈를 방문한 구수환 피디를 마을 성당 운동장으로 데려갔다. 날이 어두워질 시간이었지만 그곳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주민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피리를 연주했다. 연주하는 노래가 ‘사랑해 당신을’이었다. 연주에 맞춰 아이들이 몸을 흔들며 한국말로 노래를 불렀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살레시오 수도회의 지아코모 코미노 수사는 1960년부터 33년 동안 한국에서 가난한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스승이었고 그들의 아픔을 다독여주는 아버지였다. 1992년, 경제성장으로 한국의 생활 여건이 나아지자 그는 자신의 도움이 더 절실한 아이들을 찾아간다며 북수단으로 떠났다. 2005년, 남수단과 북수단의 평화협정 체결로 총성이 멈추자 그는 톤즈에 가서 이태석 신부와 오랜 시간을 같이 했다. 코미노 수사는 구수환 피디에게 “이곳에서 5년 동안 있었는데 아이들이 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죽어도 절대로 울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구수환 피디는 톤즈 아이들에게 이태석 신부의 생전 모습과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의 얼굴이 화면에 따라 변해갔다. 암 투병 중인 이태석 신부의 얼굴이 보이자 모두 괴로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시신을 운구하는 행렬이 보이는 순간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들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구수환 피디는 2020년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을 연출하고 상영했다.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2019년 남수단으로 찾아가서 이태석 신부가 톤즈에 학교를 짓고 가르쳤던 제자들을 수소문했다. 의사가 되었거나 의대에 다니는 제자들이 무려 57명에 달했다. 작고 가난한 톤즈 마을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후 공무원, 대통령실 경호원, 언론인까지 모두 70명의 제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제자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부님 때문에 의사가 되었고, 신부님처럼 살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제자들이 병원에서 진료하는 모습을 보니 먼저 “어디가 아프세요?” 묻지 않고 환자 손부터 잡았다. 손을 잡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 진료하기에 구수환 피디가 그 이유를 물었다. 제자들은 “신부님이 해오던 진료 방법입니다”라고 답했다.



어느 날은 이태석 신부의 제자들이 한센인 마을에 가서 봉사 진료를 했다. 60명 정도 사는 마을인데 환자 300명 정도가 모였다. 의사가 없으니 주변 마을에서 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제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쫄딱 굶으며 진료했다. 어느 환자는 12년 만에 진료를 받았다고 했다. 환자에게 “의사가 당신 손을 잡았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태석 신부님이 저희 곁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제자들은 “신부님이 우리 옆에 계신 거 같았습니다. 신부님 일을 우리가 대신해서 너무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이태석 신부가 쏟은 사랑이 의사 57명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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