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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Oct 04. 2024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누가 알았을까 2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 권정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올 때마다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저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원고지에 옮겨 적었다.



권정생이 사는 집은 아버지가 소작하던 땅 주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주인은 다른 사람에게 소작을 주었으니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1967년 초, 평소 다니던 교회의 문간방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종지기로 16년 동안 살았다. 그는 “내가 예배당 문간방에 살면서 새벽종을 울리던 때가 진짜 하느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권정생은 교회 종지기로 일할 때 오전 네 시면 어김없이 종을 쳤다. 추운 겨울날, 장로가 시골장에 가서 목장갑을 하나 사 주었다. 그러나 한 번도 그 장갑을 끼지 않았다. 맨손으로 서리가 서걱거리는 종의 줄을 잡고 종을 쳤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그리고 그는 하얗게 내린 서리가 달빛에 보석처럼 빛나는 마당을 가로질러 자기 방으로 갔다.



어느덧 의사가 말한 2년이 지났는데도 권정생은 살아 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 뜰을 바라보았는데 유난히 싱싱하게 피어난 민들레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른 민들레보다 꽃대가 두 배는 굵은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민들레 옆에 강아지똥이 뒹굴고 있었다. 더럽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강아지똥이 민들레꽃을 탐스럽게 피워 올린 것이다. 문득 하느님은 이 세상에 쓸데없는 것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부터 방바닥에 엎드려 글을 쓰기 시작하여 두 달 만에 이야기를 완성했다. 권정생은 그 이야기에 <강아지똥>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몇 달 뒤 그는 《기독교교육》에서 수여하는 제1회 기독교 아동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동화 <강아지똥>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1973년 어느 날 교회 문간방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사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권정생이 좋아하는 아동문학가 이오덕이었다. 이오덕은 “선생님이 쓴 <무명저고리와 엄마>를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동화작가이며 목사인 이현주는 <무명저고리와 엄마>에 대해 “동화 읽기가 힘들다. 권정생의 동화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이 작품은 특히 더 그렇다”며 “작가가 지병을 앓으며 3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한 줄 두 줄 써내려간 것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편의 장편소설로나 옮길 수 있는 내용을 단편동화에 담았으니 무게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고 평한 바 있다.



이오덕은 권정생보다 열두 살이나 위인데도 하대하지 않고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산골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오덕은 권정생을 처음 보고 ‘오직 동화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권정생의 건강을 염려하여 두어 시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정생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손에서 하루도 펜을 놓지 않았다. 그는 동화를 쓰면 편지와 함께 이오덕에게 보냈다. 이오덕은 권정생의 작품을 들고 신문사와 잡지사를 찾아다녔다. 작품이 지면에 실릴 기회를 주지 않는 곳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면 이오덕은 편지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해왔다. 이오덕은 권정생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주말이면 권정생의 원고를 품고 서울에 가서 잡지사와 출판사 담당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덕분에 권정생의 작품은 지면을 통해 꾸준히 발표되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잉크로 글을 쓰지만 권정생은 피를 찍어서 글을 쓴다”고 한 이오덕과 권정생의 인연은 2013년 8월 25일 이오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간 지속되었다.



권정생이 발표한 작품들과 출간한 책들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원고청탁이 들어왔다. 어느 날 경상북도 울진에 있는 시골 교회에서 목사가 찾아왔다. 그 목사의 부탁으로 1981년부터 울진교회 청년회지에 연재한 글이 바로 《몽실 언니》이다. 이 소설은 다음해 교회 여성잡지인 《새가정》으로 옮겨 4회부터 연재하다가 1984년에 연재를 마쳤다. 그해 4월 《몽실 언니》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몽실 언니》는 출간 이후 사람들로부터 크게 사랑 받았다. 1990년에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었고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책이 많이 팔린 덕분에 인세를 넉넉히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권정생은 인세와 원고료로 받은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통장에 넣어두었다. 그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곧 올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삶은 항상 소박했으며, 검소하고 겸허한 자세를 잊지 않았다. 자신에게 넘치는 것은 절대로 소유하지 않았으며, 늘 이웃과 어린이들을 위해서 먼저 마음을 썼다. 지인들이 가져다준 먹을거리가 많다 싶으면 이웃집에 나눠주었다. 길을 가다가 손등이 튼 아이를 발견하면 얼른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주었다.



1982년, 권정생은 조탑리에 있는 빌뱅이 언덕에 다섯 평짜리 흙집을 지어 이사했다. 집은 마을 청년들이 흙벽돌을 찍어 직접 지어주었다. 새집은 마을의 골목길이 끝나고 흙길을 한참 지난 곳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마을에서 흙집으로 이어진 길에서부터 마당까지 온갖 풀이 무성했다. 어느 여름, 풀숲을 헤집고 찾아온 손님이 흙집 마당의 풀들을 베어내려고 하자 권정생은 펄쩍 뛰며 말렸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절대 베어서는 안 돼요. 그것들도 다 생명이 있고 의미가 있어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절대 베지 마세요.”



전신결핵 때문에 오랫동안 통증에 시달려오던 권정생의 병세는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소변에서 피고름이 섞여 나오고 늘 가슴이 답답하며 숨이 찼다. 숨을 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몇 번이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어야만 겨우 호흡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 번 호흡곤란이 시작되면 심한 통증까지 동반해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권정생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2005년 초여름, 권정생은 정호경 신부에게 5,000만 원을 주면서 북한에 옥수수를 사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명 작가가 된 뒤에도 맛있는 음식 한번 사 먹은 적이 없고, 비싼 옷 한 벌 사 입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북한 동포를 위해서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그는 북한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권정생은 2007년 3월 31일 오후 여섯 시 10분에 정호경 신부 앞으로 유서를 작성했다.


“지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3월 12일부터 갑자기 콩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뭉툭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 되었습니다. 지난날에도 가끔 피고름이 쏟아지고 늘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아주 다릅니다. 1초도 참기 힘들어 끝이 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모두한테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쪽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베트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한상봉, <정호경 신부님 사랑합니다>)



2007년 5월 16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맑은 목소리로 영혼을 노래했던 권정생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된 유골은 부모님 산소와 빌뱅이 언덕에 뿌려졌다.



권정생 선생은 가난한 삶이라야 영혼이 맑아지고 투명해진다고 여겨서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했다. 동화 100여 편을 남겼지만 그 자신이 평생 소유해 본 것은 다섯 평짜리 오두막 한 채가 전부였다. 마을 청년들이 흙벽돌을 찍어 만들어준 집에서 살았던 그의 한 달 생활비는 5만 원이었다.



마을 노인들은 그저 혼자 사는 노인으로만 생각했던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전국에서 수많은 조문객이 몰려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우는 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또한 병으로 고생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동화 작가로서 인세 수입이 연간 수천만 원 이상이라는 걸 알고 놀랐고, 그렇게 모인 재산 10억 원과 앞으로 생길 인세 수입을 모두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장에 밝혀 놓은 걸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56년 만에 통일 기관차가 휴전선을 처음 넘던 날을 하루 앞두고 권정생은 우리 곁을 떠났다. 권정생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은 귀하게 여기고,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찮게 여기며, 이 땅에서 가장 낮고 천하게 살았으므로 가장 높고 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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