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1926년에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이듬해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었다.
대구경찰서로 끌려간 이육사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순사는 육사를 천장에 매달고 채찍으로 매질했다. 몸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졌다. 육사는 매질을 견디지 못해 정신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순사는 고문 기구를 넣어 두는 곳에 가서 대침을 꺼냈다. 그것은 성냥개비만 한 굵기의 대나무로 만든 침이었는데, 길이는 젓가락만 했고 끝을 뾰족하게 깎은 것이었다. 그런 대침 하나만 손톱 밑에 박아도 기절해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순사는 육사의 팔을 책상 위에 잡아매어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집게손가락 손톱 밑에 대침을 사정없이 쑤셔 박았다. 육사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금방 그의 손가락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육사는 고통으로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지만 결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순사가 대침을 하나 더 박았지만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일제는 이육사에게 폭파사건의 진범이라는 혐의를 두었으나 증거가 없어서 대구경찰서 미결수 감옥에 가두었다. 수인번호가 264번이었던 육사는 그곳에 2년 7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석방되었다. 이육사의 원래 이름은 이원록이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뒤에 수인번호 264번을 떠올리며 이육사(李陸史)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국내와 중국을 비밀리에 오가며 항일운동을 하던 이육사는 1943년 7월에 어머니와 큰형 제사에 참석하려고 귀국했다가 10월에 검거되어 서울에서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중국 베이징의 일본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었다. 일본 경찰은 그들이 고안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육사를 고문하였다. 1944년 1월 16일, 혹독한 고문으로 육사가 사망하자 일본인 간수는 그의 친척인 이병희에게 연락했다. 이육사의 딸 이옥비는 그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베이징 감옥에서 아버지 시신을 인수한 사람이 이병희 선생이에요. 이병희 선생은 아버지와 최후를 함께한 동지로 같은 일로 같은 감옥에 갇혔다가 며칠 먼저 풀려나와 있었대요. 이병희 선생은 그날 아버지가 소개해준 군사간부학교 후배와 선을 보기로 돼 있었대요. 그런데 감옥에서 안면이 있는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고 연락이 왔대요. 달려가 봤더니 옷이 피로 낭자하게 젖었더래요. 눈을 못 감고 계시더래요!”(김서령, <강하고 향기로운 문학 낳은 지조의 땅>)
그날 이병희는 베이징 근처에 있는 화장장으로 육사를 실어 날랐다. 멀쩡한 사람을 죽여 놨으니 가만두지 않겠다고 간수를 협박해 화장에 필요한 돈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 일본인 간수는 평소 아버지를 존경하던 사람이었대요. 시체를 그냥 없애버려도 무방했겠지만 자기 딴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하도 애통해서 이병희 선생에게 연락했던 거겠지요. 그러나 이병희 선생은 화장해서 유골함을 받아 안았지만 막상 갈 데가 없었대요.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동지이고 친척인 이귀례 씨가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며칠 전에 해산을 했대요. 그 집으로 유골을 안고 가서는 신생아의 머리맡에 아버지 유골을 두고 둘이서 통곡했답니다.”(김서령, <강하고 향기로운 문학 낳은 지조의 땅>)
이로부터 며칠 후, 베이징 주재 일본영사관에서는 서울 명륜동 이육사의 집으로 편지를 발송하여 그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서울에서는 편지를 받은 이튿날 육사의 막내 동생인 이원창이 베이징으로 건너가 그의 유골을 안고 귀국했다.
열일곱 번째 투옥되었다가 해방을 1년여 앞두고 베이징 감옥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이육사가 1942년에 발표한 작품이 <광야>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
씨를 뿌려야 식물이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눈이 내리는 계절에 피어나서 홀로 아득한 매화 향기는 머지않아 봄이 오리라는 걸 예감하게 한다. 하지만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지금 뿌리는 씨가 싹을 틔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가난한 노래의 씨인 것이다. 그런데 왜 시인은 지금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 천고의 뒤에 초인이 목놓아 부르게 한다고 했을까?
‘천고의 뒤’는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를 뜻한다. 시적 화자는 노래의 씨를 뿌려서 아주 까마득한 미래에 백마를 탄 초인이 목놓아 부르게 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이 땅에 노래의 씨를 뿌리면 오랜 뒤에 백마를 탄 초인이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인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백마를 탄 초인이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하지 않고 백마를 탄 초인으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겠다’고 말한다. 지금 노래의 씨를 뿌려서 아주 까마득한 미래에, 그것도 보통 사람도 아니고 백마를 탄 초인이 목놓아 부르게 하겠다는 것은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이 그럴 만큼의 가치 있는 행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그럴 만큼 가치 있는 행동이 되게끔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정년 퇴임식에서 이육사의 <광야>를 수업하며 ‘가난의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을 강조한 선생님이 있다.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의 저자 이상석 선생님이다. 1988년에 발간된 이 책에 제자가 스승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늘 저희들 곁에서 올바른 교육자로서 참된 교육의 의미를 전해 주시려고 지금 이 시간에도 남모르게 괴로워하고 계실 선생님을 생각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선생님,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류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이나 다니다가 시집만 잘 가는 것이 여자로서의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학교에 입학한 후 일주일에 두 번씩 저희들 교실에 들어오셔서 열변을 토하시며 삶의 애환과 사랑을 전해주시는 국어 선생님. 그분 덕분에 제 마음이 성숙해 갔고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쌓여 제 삶의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선생님, 제 자신이 성숙하고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은혜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잊는다는 말조차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언젠가 제가 원하는 교사가 되어 떳떳하게 이 교정을 다시 찾았을 땐 설사 꼭 여기가 아닌 이 땅의 어느 곳에서라도 선생님과 더불어 교육자의 길을 걷는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동반자가 되어 제 인생을 개척해 가고 싶습니다.”
온몸으로 삶의 애환과 사랑을 전해주는 교사한테 배우는 아이들은 참 행복하다. 그 아이들이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서 쓴 글을 받아보는 교사 역시 더없이 행복하기 마련이다
2015년 2월 7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신도초등학교 강당에서 이상석 선생님의 정년 퇴임식이 진행되었다. 이상석 선생님이 35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면서 가르친 제자들과 동료 선생님들, 후배 선생님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대양중학교, 대양공업고등학교, 성모여자고등학교, 부산중앙고등학교, 부산진고등학교, 경남공업고등학교, 양운고등학교, 그리고 신도고등학교 제자들이 선생님의 수업을 듣기 위해 전국에서 모였다. 이상석 선생님은 <광야>로 퇴임 수업을 시작했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를 가장 인상 깊은 구절로 꼽았다.
좋은 경치를 보면 제일 먼저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상석 선생님은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나 네댓 살 때부터 부산에서 살았다.
이상석은 중학교 때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결국 재수하여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입학식 날 어느 후미진 건물에서 담배를 피우다 수위 아저씨에게 들켜 버렸다. 아저씨가 잡으러 오자 날 잡아보란 듯이 담배를 입에 문 채 요리조리 피해 도망 다녔다. 아저씨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지만 공사하느라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건축자재들 때문에 그를 잡지는 못했다. 그만큼 이상석은 학교에 애착이 없었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거칠게 행동했다. 그때 재수하고 들어온 친구들과 죽이 맞아서 중국집 2층 방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는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학교 학생인지 드러나는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게 부끄러워 버스를 타지 않고 골목으로 철둑길로 한 시간가량 뛰어서 학교에 갔다.
이상석은 학교에는 도무지 뜻이 없었다. 헛된 짓에 정신 팔고,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녔다. 비가 오는 날에는 만사를 제치고 해운대 해변을 미친 듯이 헤매곤 했다. 같은 반 친구들도 도저히 종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성적과 가정환경을 조사하여 만든 특별학급에 속해 있던 반 아이들은 열등감과 자만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 시절에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그들을 바로잡아 주었던 분이 담임인 윤덕만 선생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