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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Oct 09. 2024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2

비가 세차게 뿌리던 날, 건물을 새로 짓느라 우선 판자로 막아놓은 뒷문이 비바람에 떨어져나가 버렸다. 교실에는 빗물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서무실에 연락하거나 다시 문을 달아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누군가 소리쳤다.


“야, 학교가 뭐 이래, 이거! 이게 우리한테 잘 해주겠다는 약속이야? 우리, 집에 가뿌자. 비 새는 교실에서 우째 공부할끼고.”


“그래, 가자. 처음부터 고분고분하면 안 돼. 학생을 위한다는 학교가 이럴 순 없어. 본때를 보여주자.”


이상석이 덩달아 소리치자 교실은 순식간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가방을 챙겨서 우르르 교실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는 학교 뒷문을 통해 탈출해 버렸다. 그때는 그 일의 심각성을 전혀 몰랐다.



이튿날 학생들의 집단 행위 운운하는 얘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주눅이 들었다. 또 주동자는 퇴학 처분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너희들을 잘못 보았다는 말만 했다. 다음날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전날 교장 선생님과 오랫동안 말씀을 나누었다는 담임 선생님이 학교에 오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이 걱정되어 집으로 가보았더니 선생님은 편지만 남겨 놓고 어디론가 떠난 상태였다.



편지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너희의 아픈 가슴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너희들을 볼 때마다, 혼자 있는 밤마다 나는 너희들의 갈피 잡을 수 없는 혼미가 가셔지도록 기도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한 대로 너희는 본래의 모습을 찾으리라고 믿었다. 이것은 지금도 믿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번 일은 너희의 잘못이 너무 크다. 너희 중에 몇 명이 퇴학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나는 이 처벌을 보고 있을 수가 없다. 근본적인 잘못은 학교와, 지도를 잘못한 내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이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너희들은 이번 일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한데 앞으로 주의하기 바란다. 교장 선생님께는 너희의 선처를 다시 빌어 두었으니 별일이 없으리라 본다. 내가 학교를 떠남으로써 너희들이 바로 클 수 있다면 좋겠다. 선생님들께 용서를 빌고 부디 너희들 본래의 모습을 찾기 바란다.”(이상석,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



아이들은 반장이 읽어주는 편지를 듣고 엉엉 울었다. 선생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의 아픔으로 감당하던 선생님이 계시지 않자 아이들은 숙연해졌다. 며칠 뒤 몇 명이 근신 처분을 받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되었지만 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선생님이 머물고 있는 고향집에 붙어 앉아 울며불며 도로 가자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다음날 선생님은 교실로 불쑥 들어섰다. 뒤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이 사표를 제출한 까닭은 학생들이 일으킨 사건 때문만이 아닌 듯했다. 그동안 선생님은 교내의 여러 가지 비리를 시정하기 위해 애써왔는데 학교 측에서 사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이 사표를 반려하자, 그 조건으로 학급 경영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한다.



선생님이 돌아오자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자주 가출해 대던 아이들도 선생님한테만은 행선지를 알리거나 스스로 돌아와 무릎 꿇기도 했다. 그렇다고 문제아들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는 법이어서 선생님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믿고 끝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스스로 옳은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며 아이들 곁에서 큰 울타리 구실을 하였다.



그렇게 아이들 곁에서 울타리 구실을 하며 아이들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그러안는 교사의 사랑은 영혼을 맑게 해주는 힘이 있다. 그런 선생님은 아이들로 하여금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준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존재로 기억되는 것이다.



집단적으로 학교를 탈출한 사건이 터진 이후에 이상석은 아이들이 사고를 저지를 때마다 오히려 선생님 편이 되어갔다. 이상석이 국어 교사가 되고자 했던 것은 윤덕만 선생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선생님으로부터 방탕한 삶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배웠고, 그 죄를 씻기 위한 길은 올바른 교사가 되어 자신처럼 잘못된 아이를 옳게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윤덕만 선생님만큼 좋은 교사, 올바른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는 “선생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셨다. 형이셨다. 그리고 스승이셨다. 깊은 학문을 배운 기억은 없다. 온 가슴으로 그 사랑의 비를 흠뻑 맞았다”고 했다.



윤덕만 선생님의 사랑 덕분에 교사가 되려고 마음먹은 이상석은 1979년부터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교사생활을 하면서 처음 2, 3년 동안에는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잘못한 일로 꼽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폭력이다.



이상석이 처음 교단에 섰을 때 야간 공고 3학년을 맡았다. 독립선언문을 가르치는 첫 번째 수업시간에 내준 숙제를 세 번째 수업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들 해왔는데 한 학생이 해오지 않았다. 제일 뒷자리에 앉은 심태훈이란 학생이었는데 이상석보다 덩치도 훨씬 컸고 구레나룻도 많이 검었다. 그 학생에게 다음 시간까지 해오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역시 숙제를 안 해왔다. 무엇 때문에 숙제를 안 해왔냐고 물었더니 숙제할 형편이 못 된다고 대답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가당찮게 핑계 대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교사란 권위를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과 초임 때부터 학생들을 잡아두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막대걸레의 자루를 발로 부러뜨려 거머쥐자 태훈이는 숙제 안 해온 걸로 때릴 수 있냐며 항변했다. 그러면서 점수를 깎으면 될 거 아니냐고 했다. 엎드릴 자세는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몽둥이로 허벅지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연이어 허리와 등을 계속 쳤다. 아이들이 나와서 말렸으나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리곤 교실 문을 걷어차고 나와 버렸다. 그날 태훈이는 허리를 움직일 수 없어 양호실에서 약을 발랐고, 며칠간 침을 맞고서야 겨우 몸이 풀렸다.



며칠 후 산꼭대기의 판자촌 동네에 살고 있는 태훈이네 집으로 가정방문을 가게 되었다. 집은 부엌 하나 방 한 칸이었지만 깨끗하고 말쑥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편모슬하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공장에 나가고 누나들도 돈 벌러 집을 나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태훈이가 소주 한 병과 과일 몇 쪽을 가지고 들어왔다. 선생님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가 소반에 준비해 두고 일을 나간 것 같았다.



태훈이는 고등학교에서 와서 처음으로 선생님한테 맞아 봤다며 “와, 아프데예. 그래도 속은 시원합니다. 우리 엄마한테는 애들하고 싸웠다고 했습니더. 이런 거는 예사라예”라고 말했다.


“싱글싱글 웃으며 소주잔을 채우는 녀석을 보며 내 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결국 이 녀석한테 ‘내가 졌구나’ 하는 소갈머리 없는 생각도 했다. 알량한 교사의 권위를 나는 거창한 그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겠다. 그러나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놈은 그냥 두지 않겠다. 고개 팍 숙이고 말 잘 들으면 딴것은 내가 용서해 주겠다.’ 대강 이런 식의 생각이 아니었던가.”(이상석,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



교사들은 누구나 아이들을 대하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시행착오를 겪거나 잘못을 범하기 마련이다. 교사가 실패나 실수를 경험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일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쓰라리게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교사는 불행하다.



신영복은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는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할지 생각해봅니다”라고 했다.



이상석은 교사 시절 초기에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몇 번의 경험을 두고두고 되돌아보았다. 그것은 신영복의 말처럼 과거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교사의 권위를 잘라낸 자리에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간직했다. 그리고 조금씩 교사로서의 바른 태도를 배워갔다.



이준원은 1984년 충북대 체육학과를 졸업한 뒤 경기도 광주동중 교사가 되었다. 줄곧 평교사로 근무하다가 내부 공모를 통해 2012년 2월 경기도 고양시 덕양중 교장이 되었다. 이준원 교장은 학부모와 학생, 교사의 내면을 치유하고 소통하는 학교, 행복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학교를 지향하였다.



김종철 한겨레 기자는 2020년 4월 이준원 전 덕양중학교 교장을 만나 인터뷰했다.


- 최근 방송된 다큐를 보니까 졸업식 때 학생들이 교장 선생님 품에서 울더군요. 담임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한테 그러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어요.


“전임 교장 선생님들이 악역을 잘해주셔서요.(웃음) 농담이고요. 요즘 아이들이 대부분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성적으로만 인정받잖아요. 학교나 가정, 사회에서 있는 그대로 존중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저희 학교에서 그런 경험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덕양중에 가면서 굳게 맹세한 게 있어요. ‘감시하고 억압하고 질책하고, 자신의 잣대나 틀 안에 들어왔느냐 아니냐 하는 걸로 잔소리해서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엄격한 경계 세우기는 하되 교사와 학부모뿐 아니라 아이에 대해 한 명 한 명의 존재 자체를,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자. 교장 대 학생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자. 말이 아니라 행위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여주자’고 말입니다.”(김종철, <땡감 같은 아이들에게 달콤한 홍시 기대하는 사람들이 잘못>)



이준원 교장은 아이들을 기다려주고 존중해주며 공감해주고 엄격하게 훈계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에게 계속 강조했다. 물론 그걸 제일 먼저 실천한 사람은 이준원 교장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교장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2년 전 아이들은 졸업식을 진행하지 못할 정도로 울어서 이준원 교장이 “이제 그만 울자”고 진정시켰다. 그때 ‘요즘 아이들이 정말 사랑에 굶주려 있구나, 좋은 관계에 목말라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성적으로 줄 세우고 외모로 평가하는 데 대해 아픔이 컸던 것이다.



이준원 교장은 첫 임기 4년을 마치고 다른 데로 옮겨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부모와 교사들이 극구 만류해서 덕양중에서 정년을 마치기로 했다. 2020년 1월 8일 덕양중의 졸업식에서 교사들도 졸업장 수여식을 마친 교장을 껴안고 흐느꼈다.


- 졸업식 때 아이들뿐 아니라 선생님들도 교장 선생님을 끌어안고 울더군요.


“그동안 사막 같은 교직생활을 해오셨던 분들이 특히 그러셨죠. 교장과 교감, 관리자, 선배 선생님들에게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입시학원 같은 학교에서 일하면서 이게 내가 꿈꾼 교사가 아닌데 하면서 염증을 느꼈던 분들은 덕양중학교에 와서 깜짝 놀라요. 행정실 직원이나 청소하는 분들, 급식하는 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을 존중해야 할 동료 교사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적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만큼 대한민국의 학교 문화가 경직되어 있어요. 사실 덕양중 같은 모습이 당연한 건데 말이죠.”(김종철, <“이른바 엘리트 부모들이 더 마음의 환자”>)



이준원 교장은 할 얘기가 있으면 선생님이나 행정실무 선생님을 교장실로 부르지 않았다. 가능하면 교무실로 찾아갔다. 수업 사이 10분 쉬는 시간에 오라 가라 하는 게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교사도 상처를 받는다. 자기를 무시하고 권위적인 자세로 명령하는 교장에게 상처를 받는다. 터무니없는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에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동료 교사에게도 상처를 받는다. 이보다 더 큰 상처는 아이들에게 받는 상처다. 그래서 이준원 교장은 교사가 내면에 지니고 있는 아픔을 치유하는 훈련을 진행했다. 그런 훈련을 통해 교사들은 동료의 마음과 삶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겪었던 아픔을 듣고 서로 위로했다. 업무 중심이었던 학교에서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지지하는 생활공동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상석 선생님은 교사가 아이들의 잘못을 불평할 것이 아니라 슬퍼하라고 했다.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화를 내지 말고 슬퍼하라고 말했다. 또한 교육은 아이들에게 인생의 맛을 알게 하는 것, 인생의 맛을 알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이준원 교장은 2020년 2월 정년 퇴임할 때까지 8년 동안 학교 근처에 방을 구해 혼자 자취생활을 했다. 덕양중에 온 정성을 쏟기 위해서였다. 그는 덕양중학교에서 몸은 힘들고 바빴지만 참 행복했다고 했다.



그렇게 이상석 선생님과 이준원 선생님은 척박한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 묵묵히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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