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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Oct 11. 2024

더없이 멋지고 아름다운 선물

세영이 어머니는 중학교 3학년인 딸이 학교에 내야 할 돈이 있다고 해서 10만 원짜리 수표를 주었다. 세영이는 친한 친구 두 명과 마침 지나가던 친구 한 명, 이렇게 셋이 보는 데서 수표라고 걱정하며 책가방에 달린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에 그 수표가 사라져버렸다. 세영이는 의심이 가는 친구 앞에서 수표가 없어졌다고 얘기하면서 표정을 살폈지만 시치미를 딱 떼었다. 세영이 어머니와 세영이는 결국 본인이 잘 간수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며 포기하기로 했다.



세영이 어머니는 딸의 졸업식을 앞두고 이러한 사실을 담임 선생님께 말씀 드려서 얼마 남지 않은 아이들의 중학교 생활을 어수선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그 친구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의심 가는 것이지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그런데 같은 학부모로 알게 되어 가깝게 지내는 선물 가게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 얘기가 있다며 꼭 들르라고 했다. 세영이 어머니를 만나자 그는 “세영이 엄마, 혹시 미숙이네랑 돈 거래하세요?” 하고 물었다. 세영이 어머니는 가슴이 철렁했다. 딸이 며칠 전 수표를 잃어버리고 의심했던 그 아이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왜요?”


그는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얼른 뒷면을 보았다. 세영이 어머니가 서명한 자리 아래에 미숙이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세영이 어머니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분이 말했다.


“어쩐지 미숙이의 행동이 이상했어요. 3,500원짜리를 사면서 10만 원짜리 수표를 내놓더라고요. 서명하라고 했더니 ‘꼭 해야 돼요?’ 하는 거예요. 우물우물하더니 쓰더라고요. 좀 의심이 갔는데 세영이 어머니의 서명이 있었어요.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이상했어요.”


“실은 그 수표가…….”


세영이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 수표를 현금과 바꾸어 가졌다. 그렇지만 선물 가게 주인에겐 비밀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담임 선생님과 의논을 해? 미숙이를 만나? 아니, 미숙이 어머니를 만나? 만나서 뭐라고 말하지?’ 세영이 어머니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났다. 세영이 어머니는 딸의 졸업식 날 미숙이에게 카드와 꽃을 주었다. 카드에는 세영이 어머니의 정성을 담아 편지를 썼다.



미숙아 졸업을 축하한다.

나무가 자라면서 때때로 벌레 먹고 죽어가는 가지가 있단다. 그 가지를 그냥 두면 나무 전체가 죽을 수도 있단다. 그러므로 그 가지는 잘라내야 한단다. 잘라내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세영이가 학교에서 잃어버린 수표를 선물 가게 아주머니에게서 10만 원과 바꿨단다. 이 일은 선물 가게 아주머니와 너와 나만 알고 있단다. 네가 건강한 나무로 자라기를 기도한다. 이 수표는 네 졸업 선물이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바라볼 거야.

                                                                                                                                 세영이 엄마가.



미숙이는 교문을 나서는 세영이 어머니에게 쫓아와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자기가 받은 꽃다발을 주었다. 그리고 세영이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 눈물이 그렇게 아름답게 반짝일 수가 없었다.



《이 시대를 사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을 새롭게 고쳐 쓴 글이다.



세영이 엄마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사람들은 대개 담임 선생님한테 사실을 털어 놓거나 미숙이를 만나서 몰아붙였을 것이다. 혹은 미숙이 엄마를 만나야 하는지도 고민했을 것이다. 세영이 엄마는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고 미숙이를 진심으로 아끼고 위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세영이 어머니는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미숙이의 잘못을 너그러이 감싸 안으면서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다. 아마 미숙이는 세영이 어머니한테 받은 멋지고 아름다운 졸업 선물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을 쓴 대화기법 강사 이민정은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녀가 부모한테, 학생이 교사한테, 남편(아내)이 아내(남편)한테 이해받고, 존중받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희망세상 만들기 - 즉문즉설’이란 이름으로 전국에서 강연하고 있다. 즉문즉설에서 주로 부모와 자식, 부부, 친구, 직장 동료 등 여러 가지 인간관계의 갈등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법륜 스님은 갈등의 주원인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고집할 때 일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서로 다투면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너무 내 중심으로 보지 말고 ‘그 사람으로서는 그럴 수 있구나’ 하고 이해하는 관점에서 접근해 보라고 주문한다. 스님 말씀대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인간관계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이 한결 줄어들지 않을까?



다음의 문답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입장에서만 상대방을 바라보는 데 익숙한지,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얼마나 서투른지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질문자 : 저는 두 달 전에 제대한 아들이 있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공부를 안 해서 올 F학점을 받았습니다. 제 생각은 제대했으면 빨리 밖으로 나가서 세상과 부딪히고 남자다움을 키우고 책임감을 좀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두 달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꾸 답답해서 잔소리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법륜 스님 : 그런데 어떤 집 아이는 정신적으로 안 좋다고 군대 가서도 퇴짜 맞아서 오는 경우도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래도 자기 집 아이가 대한의 남아로서 군대까지 잘 마치고 나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에 만족해야 돼요. 기독교 신자예요? 불교신자예요? 종교가 없어요?


질문자 : 불교입니다.


륜 스님 : 그러면 부처님께 기도할 때 이렇게 하세요. “부처님 우리 아들이 대한의 남아로서 건강하게 국방의 의무를 잘 마치고 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아들이 잘 살아갈 겁니다.”


그렇게 탁 믿고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대학을 가도 좋고, 안 가도 좋고, 직장을 구해도 좋고, 집에 있어도 좋고. 당분간은 지 알아서 하도록 한번 놔 놓으시지요. 왜냐하면 사춘기 때 엄마가 너무 간섭을 많이 해서 아이가 지금 질려 있어요. 그래서 아이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요. 그런데 거기다가 “왜 니가 니 인생 못 찾느냐”고 또 간섭하고 있어요. 그러니 옛날 후유증이 좀 치유가 되려면 지금은 좀 가만히 놔둬야 되겠는데…….


질문자 : 스님, 그런데 저는 간섭을 안 했습니다.


법륜 스님 :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말소리만 딱 들어봐도 간섭 많이 했어요.(청중들 모두 쓰러질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질문자도 너무 웃어서 말을 못 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스님은 왜 그리 법문을 웃기게 하냐” 그러는데 오늘도 내가 웃기는 거예요? 질문자가 웃기는 거예요?(청중들 웃음) 나는 그냥 얘기하는데 항상 보면 질문자가 웃겨요.(청중들 웃음)


마음에서 일어나는 건 하루에 열 번쯤 일어나는데 실제로 말로 표현하는 건 두 번밖에 안 했어요. 그러면 자기는 간섭했다고 생각할까? 안 했다고 생각할까? 안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간섭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마음대로 다 표현을 안 했다. 이 뜻은 이해가 됩니다. 자기 성격으로 봐서는 간섭을 안 할 수도 없고, 간섭을 하더라도 조용조용 안 하고 세게 하게 되고. 다만 자기 생각한 것보다는 적게 간섭했다. 그것은 충분히 인정해 드릴게요.(청중들 웃음)


계속 부처님께 절하면서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 건강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이를 탁 믿고 놔둬야 돼요. 아들이 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지금 방에 가만히 있는 게 좀 필요한 시기이구나’ 이렇게 믿고 놔두세요. 또 공부를 하면 ‘공부하는 게 필요하구나’ 하면서 놔두세요. 공부하면 일하라 그러고 일하면 공부하라 그러고 가만히 있으면 공부하라 그러고. 이렇게 하면 안 돼요. 가만히 놔둬 보세요.


그러면 내 공부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들의 모습에 끄들려서 내 생각대로 안 된다고 ‘니 문제야! 문제야! 문제야!’ 이게 마음속에 열 번도 더 일어나거든요. 그런 아들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내가 되는 공부를 먼저 해야 합니다.


질문자 : 감사합니다.



법륜 스님에게 질문한 어머니처럼 우리도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게 아닐까? 부모가 아이를, 교사가 학생을, 부부가 배우자를, 상급자가 하급자를 대할 때 종종 그렇듯이 우리는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은 사람들이 그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옳다고 믿어왔던 가치관을 허물어뜨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가치관의 변화는 인간관계의 변화로 이어진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인간관계의 결이 달라질 수 있다.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태도는 내 입장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상대 입장에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헤아리고 또 헤아리는 것이다. 이날 질문자는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한다. 그 웃음에는 내가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관점을 벗어나 비로소 아들을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다는 기쁨이 듬뿍 담겨 있을 것이다.



경상남도 통영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김화수는 《냥글냥글 책방》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일을 다음과 같이 돌아보았다.


“나도 한때는 사람 돌보는 것과 동물 돌보는 것이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사람과 동물은 다르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이다. 우리는 그 아이가 무언가가 되어 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공부 잘 하는 사람, 재능이 뛰어난 사람, 돈 잘 버는 사람. 꼭 그런 게 아니라도 보통의 시민으로 제 몫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렇기에 때로는 다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물은 그렇지 않다. 그저 내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 이대로, 매일매일 똑같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동물을 돌본다는 것은 현재지향적이다.”



미래지향적인 마음이 강하면 상대방에게 변하라고 강요하기 쉽다. 내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상대를 위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오히려 반발심만 커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원한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행위를 다른 사람이 강요하면 자신의 자유와 독립성을 무시한다고 느껴져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현재지향적인 태도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의 생각과 판단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은 다르기에 사람을 대하면서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대 수준을 현재지향에 좀 더 가깝게 낮추면 인간관계는 새롭게 변할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세영이 어머니가 미숙이한테 행한 모습처럼 주변 사람들과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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