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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Sep 27. 2024

사람의 모습으로 잠시 우리 곁에 머물렀던 성자 1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

- 한하운, <전라도 길>



소록도는 한센인을 집단으로 수용하고 치료하는 시설이 있던 곳이다. 한하운은 천안을 지나 전라도의 끝인 소록도로 가고 있다. 황톳길을 걸어가다가 나무 밑에서 쉬며 신발을 벗으면 어느 틈엔가 다시 또 잘려나간 발가락 하나……. 이제 남은 발가락은 두 개밖에 없다. 발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발로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을 걸어갈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한센인들의 처지와 심정을 깊이 헤아리고 보살펴주었던 이태석 신부가 곁에 있었다면 한하운의 발을 어루만져주었을 것이다. 이태석 신부는 남수단의 톤즈에 있는 한센인 마을에 처음 갔을 때 참혹한 삶을 목격했다. 환자들 온몸에 고름이 흐르고 먹지 못해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태석 신부는 로마 바티칸으로 가서 사제서품을 받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한센인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1년 후 이태석 신부가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이 많이 놀랐다고 한다.



구수환 피디는 2010년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를 만들면서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했다.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잠시 머물렀던 성자’ 이태석 신부는 1962년 9월 19일 부산에서 10남매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났다.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요일마다 성당에 다녔다. 이태석은 형제들 중에서 유독 성당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성당에는 그가 좋아하는 풍금과 기타가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했던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맑고 깨끗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태석은 약한 사람을 보살피는 마음씨를 가진 아이였다. 아이들이 놀이에 끼워주지 않아 외롭게 있는 친구를 보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주로 장애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종종 누나와 함께 걸어가다가 고아원 앞을 지나면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물끄러미 고아원 안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누나가 가자고 해도 꼼짝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태석은 “누나, 우리 나중에 크면 고아원 차리자”라고 말했다. 또한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해 커서도 조카들이 집에 놀러오면 데리고 노는 것은 언제나 이태석의 몫이었다.



이태석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성당에서 다미안 신부(1840~1899년)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여 주었다. 이태석은 두 살 터울의 형 이태영과 함께 성당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다미안 신부는 벨기에 출신으로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선종했다.



1885년 어느 날 밤, 피로를 풀려고 목욕물을 끓인 다미안 신부는 실수로 뜨거운 물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등에 쏟았다. 그런데 통증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그의 얼굴은 점차 흉측하게 일그러져 갔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에 걸린 후 한센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어졌다고 했다. 1873년부터 1899년까지 17년 동안 한센인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쳤던 다미안 신부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교사라고 했다. 몰로카이 섬의 다미안 신부 기념비에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2009년 로마교황청은 다미안 신부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다미안 신부의 삶은 두 형제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이태석의 둘째 형 이태영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다미안 신부님의 삶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러나 동생 태석이는 영화를 본 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저도 그 영화를 보고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동생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석이 경남고등학교에 다닐 때, 간호사로 일하던 넷째 누나 이영숙은 ‘마리아 사업회’라는 단체로 들어가 평생 봉사하며 살겠다고 집을 떠났다. 둘째 형 이태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겠다는 결심을 어머님께 말씀 드렸다. 어머니는 신부가 되겠다는 둘째 아들을 말리고 또 말렸지만 이태영의 뜻은 확고했다. 1979년 1월 한센인을 돕는 일을 하려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이태영은 1989년 1월 사제서품을 받았다.



어머니가 눈물로 형을 떠나보내는 것을 보면서 이태석은 신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접었다. 어머니에게 똑같은 상처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우는 어머니를 보면서 호강시켜드리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아울러 검은색 수도복을 입을 수 없다면 흰색 가운을 입고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이태석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1981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신경외과 인턴 과정을 수료했다.



1987년 이태석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들어가 군의관으로 일했는데 제대를 4개월 앞두고 소속 부대를 옮기게 되었다. 부대 앞에 있는 성당에서 잠도 재워 주고 식사도 무료로 제공해 준다는 얘기를 듣고 이태석은 군생활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때 신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태석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그때 처음으로 평생 의지하고 섬겼던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이태석의 어머니는 봉사하고 싶으면 의사가 돼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차라리 벽촌 같은 데 가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했다. “의사가 아니어도 좋다. 왜 하필 신부가 되려고 하느냐”며 몇 날 며칠을 울면서 타이르고 말렸다. 그러나 이태석의 뜻을 꺾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결국 눈물로 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냈다.



이태석은 1991년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였고 1992년 전라도 광주에 있는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살레시오회는 신부들과 신학을 공부하는 수도사들이 부모가 없거나 가난한 청소년들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다. 아이들과 친구처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이태석에게 꼭 맞는 곳이었다. 그는 가톨릭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로마에 있는 살레시오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태석은 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곳을 직접 찾아 나섰다. 1999년 8월, 이태석이 처음으로 간 곳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였다. 하지만 나이로비의 정돈된 도시 모습은 그가 떠올리던 아프리카의 모습과 사뭇 달라 실망스러웠다. 때마침 수단에서 20년 가까이 선교 활동을 해온 인도 출신의 제임스 신부가 그를 찾아왔다. 제임스 신부는 생필품을 사기 위해 케냐로 나왔다가 의대 출신 신학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태석을 만나러 온 것이다. 제임스 신부는 그에게 “진짜 아프리카를 보고 싶다면 수단으로 가야 한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1956년 영국에서 독립한 수단은 북수단의 아랍계 이슬람 세력과 남수단의 원주민 반군이 1983년부터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태석이 도착한 곳은 남수단의 톤즈라는 마을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거리에는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들은 더러운 흙탕물을 꿀꺽꿀꺽 마셔댔다. 이태석은 씻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나는 고약한 냄새와 더위 때문에 사흘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진짜 아프리카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하고 끔찍했다. 이태석은 감전된 듯한 충격으로 며칠을 멍하게 지냈다고 고백했다. 제임스 신부는 이태석을 톤즈에 있는 한센인 마을로 데려갔다. 쓰러져 가는 움막, 터진 고름에서 진동하는 악취, 성치 않은 손과 발, 더욱이 신경이 마비돼 아픈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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