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그의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건 한 사람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다. 그의 처지를 깊이 헤아려주고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 그는 누군가에게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는 꽃이 될 수 있다.
2017년 5월 3일, 53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단역배우 서른세 명이 무대에 올라 가수 서영은의 ‘꿈을 꾼다’를 부르며 축하 공연을 했다. 화면에서 순서대로 노래를 부르는 배우 이름과 함께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 나왔는지 알려주었다.
영화 <아가씨> 중 채찍은 말한다 독회 손님 3역 한창현, 드라마 <또 오혜영> 중 피자 배달원 역 김주영, 영화 <럭키> 중 TV 여고생 1역 김정연 등등. 이렇게 단역배우 서른세 명의 얼굴과 이름을 소개했다.
금광산, 김단비, 김득겸, 김민지, 김비비, 김영희, 김유정, 김정연, 김주영, 김태우, 김현정, 박병철, 박신혜, 박종범, 배영해, 백인권, 송하율, 이윤희, 이재은, 이주원, 이진권, 임수연, 전영, 조미녀, 차수미, 최나미, 하민, 한성수, 한창현, 핲기, 홍대영, 홍성호, 황재필.
때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괜히 웃음이 나와
정신없는 하루 끝에
눈물이 날 때도 있지만
지나간 추억을 뒤돌아보면
입가엔 미소만 흘러
꿈을 꾼다
잠시 힘겨운 날도 있겠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일을 향해 나는 꿈을 꾼다
혹시 너무 힘이 들면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천천히 함께 갈 수 있다면
이미 충분하니까
자꾸 못나 보이는 나
맘에 들지 않는 오늘도
내일의 나를 숨 쉬게 하는
소중한 힘이 될 거야
꿈을 꾼다
잠시 힘겨운 날도 있겠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일을 향해 나는 꿈을 꾼다
꿈을 꾼다
잠시 외로운 날도 있겠지만
세월이 흘러서
시간이 가면 모두 지나간다
꿈을 꾼다
잠시 힘겨운 날도 있겠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일을 향해 나는 꿈을 꾼다
행복한 꿈을 꾼다
- 서영은, <꿈을 꾼다>
서영은이 부른 노래 가사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일을 향해 꿈꾸는 33인의 단역배우들은 이날 축하 공연에서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데 시상식을 마치고 그들이 단역배우의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자꾸 못나 보이는 나
맘에 들지 않는 오늘도
내일의 나를 숨 쉬게 하는
소중한 힘이 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학교든 직장이든 주인공이 아닌 사람을 주목하고 인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공부를 잘하거나 외모가 뛰어난 사람, 높은 지위에 있거나 돈을 많이 버는 사람, 두드러진 성과를 내거나 인기가 많은 사람에게 주로 관심을 쏟기 때문이다.
이 세상 낮은 곳에서 스스로 ‘아침 이슬’과 ‘상록수’가 되었던 김민기는 2024년 7월 21일 저 세상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김민기는 1991년 3월 15일부터 2024년 3월 15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에서 <학전> 소극장을 운영하였다.
학전 총무부장이었던 배우 강신일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학전이 처음으로 시도한 게 각 공연자들과 계약하는 거예요. 연극이 얼마나 어렵고 배고픈지 알기 때문에 참여하는 공연자들한테 최저 금액을 보장했어요. 기여도에 따라 약간의 차등이 있지만 그 차등이 크지도 않았어요.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다 나눠주곤 했죠.”(이동원․고혜린,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공연 계약을 하고 수익을 공개하는 건 학전만의 원칙이다.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적 관객이 얼마나 되고 수입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알 수 있다.
배우 박혁권은 이렇게 회고했다.
“학전에서 무대감독을 했었고 6개월 동안 다달이 통장에 돈이 꽂히는 마법을 경험하죠. 통장에 잔고가 있으니까 카드사에서 연락이 와서 카드도 만들었어요.”(이동원․고혜린,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밴드마스터 박진완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공연에 1,600회 정도 참여하여 드럼을 연주했다. 그는 1997년 무렵 한 달에 300만 원 넘게 받았다. 그의 수입이 김민기 대표를 포함한 극단 구성원들 중에서 제일 많았다.
배우 이황의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오랫동안 참여했고 3년 정도 조연출도 했다.
“연출부는 계약직이 아니고 정식 직원이에요. 4대 보험에 가입하게 되어 깜짝 놀랐어요. 그 당시 극단에서 4대 보험을 해준다는 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은행에서 전화가 왔어요. 첫 월급 들어왔으니까 전세자금 대출을 상담할 수 있다는 거예요.”(이동원․고혜린,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전화를 받은 이황의는 은행 직원에게 신용불량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4대 보험이 적용되니까 앞으로 신용이 회복될 거라고 설명해주었다. 그 얘기를 아내한테 했더니 울었다. 그때 전세자금을 대출 받아 집을 구했다.
김민기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일을 향해 꿈꿀 수 있도록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단역배우들, 무명배우들에게 자꾸 못나 보이는 나, 맘에 들지 않는 오늘도 내일의 나를 숨 쉬게 하는 힘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꿈을 꾼다>의 ‘자꾸 못나 보이는 나, 맘에 들지 않는 오늘’은 <단풍 1>의 ‘조금은 마른 잎, 썩은 잎, 잎에 묻은 먼지와 검은 점’이다.
빛깔이 고와 나도 모르게
다가갔어
멀쩡한 잎 거의 없고
조금은 마른 잎
썩은 잎
잎에 묻은 먼지와 검은 점……
한 잎 한 잎 모여
단풍을 만든 거구나
내 지나온 삶 얼룩투성이여도
고운 단풍 만들 수 있는 거구나
- 정연철, <단풍 1>
나의 실패와 단점, 부족함까지 내가 나를 못마땅하게 만드는 요소들도 최선의 삶에 다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면들을 싹 빼면 자기 삶이 완벽해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허접함과 못마땅함이 포함될 때 그제야 그 삶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진단한 김병수 정신과 의사가 강조한 그대로 완벽의 반대는 실패나 단점이 아니다. 불완전도 아니다. 완벽의 반대는 수용이다. 어차피 완벽하지 않은 삶이라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과 다른 사람의 삶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 완벽을 향한 열망도 좋지만 완벽하지 않은 자기 모습, 완전하지 않은 인생도 품고 가는 것이 진짜 삶이다.
그렇게 내가 지나온 삶이 얼룩투성이여도 빛깔 고운 단풍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