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야기하다가 그만 꺼이꺼이 목놓아 울어버렸다. 남동생은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어설프게 이야기에 껴들지도, 재촉하지도 않은 채. 그리고선 "누나, 나 비혼주의자야. 아니다 싶으면 빨리 관둬. 생활비 보내줄게. 애들, 같이 키우자"고말해주었다.
글을 쓰면서도 이때를 다시 생각하니 눈물이 어른거린다. 나보다 한참 어려서 내가 챙겨줘야만 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어리게만 여겼던 것은 어릴 적 기억에 머물러있기 때문이었다. 동생한테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부끄러운 마음 조금과 역시나 가족이 최고라는 든든한 마음 가득 안고 통화를 끝냈다.
우리 아빠, 엄마
다시 생각해 봐도 나는 배려가 없었다. 나는 그때, 빨리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통화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고, 부모님이 함께 계시는 자리에서, 최대한 담담하게, 큰일이긴 하지만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이 하필이면 엄마가 아기들을 함께 돌봐주신다고 1박 하러 오신 날이었다. 그날밤 엄마도 남편도 얼마나 불편한 밤을 보냈을지 가늠이 안된다.
아빠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으셨고, '어쩌다 그렇게까지 됐냐'며 화 아닌 화를 내셨다. 내가 최고인 줄 아는 딸바보 우리 아빠는 역시나 크게 아파하셨고, 우리 가족의 미래 계획을 전적으로 응원해 주셨다. 대화중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겠다는 아빠의 결연한 눈빛을 느꼈다. 독립하여 일가를 이룬 다 큰 자식, 이제 조금은 자식 걱정에서 자유로워지실 법도 한데... 너무 속상했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는 내게 아무 말씀 안 하셨다. 퇴근 후 집에 온 사위에게 '그간 얼마나 힘들었냐'며 위로하신 게 다였다. 1박 후, 집으로 돌아가셔서 '사위가 취업하고 지금까지 번 돈을 다 날린 것에 얼마나 마음 아프겠냐'며, '엄마 말고도 다른 가족들이 한 마디씩 할 테니 엄마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덧붙여 '친구들에게는 이번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인생을 살아보니 좋은 일에는 시기를, 안 좋은 일에는 기쁨과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더라'라고도 하셨다. 나는 엄마의 말씀을 듣고 가족 외에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브런치를 통해서만 말하기로).
시부모님
시부모님은 연세가 많다. 아버님은 그 시대에 결혼도 늦으신 편이었고, 그래서 첫아들인 남편도 늦게 보셨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주저했다. 결국 내가 나서야 했다. 어머님께 먼저 연락드려 다 말씀드렸고,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남편에게 연락하셨다. 남편은 부모님을 존경한다. 특히 아버님에 대한 존경심은 남다르다. 그런 아버님과의 통화에 남편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우는 모습도 처음이었지만, 마흔을 넘긴 남자가 저렇게 울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간 남편이 견뎌온 자책감, 자괴감, 좌절감, 절망감 등의 감정들이 느껴졌다. 그 순간 만큼은 가장, 남편, 아빠... 그런 역할의 무게를 내려놓은 채, 남편은 부모님 앞에서 다시 아이였다.
시부모님은 몇 번이고 내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런 말씀을 하시게 해서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괜찮다는 말은 끝내 할 수 없었다. 며칠 뒤 어머님은 전화하시어 '몰래 이런 일을 벌인 남편을 벌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어. 하지만 남편을 죄인처럼 비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런 때일수록 서로 보듬고, 마음을 모아야 해' 하셨다. 그때 내 마음이 딱 그랬다. 가족들에게 알리기로 한 마당에 남편이 실컷 욕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욕받이가 되어버린 남편 뒤에서 고소해하며 웃고 있으려고 했다. 잠깐 나는 남편을 내 사람, 내편이 아닌 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어머니가 옳았다. 시어머니 말씀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잊지 말자.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나뿐이고, 내가 온전히 잘되길 바라는 사람은 부모뿐이라는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는 말이 있는데,돈이 없어 쉬운 길도 어렵게 가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잘 버텨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