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는 매미를 멸종시킬 뻔했다
나는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그 당시 포항제철소와 도로 하나(아래 글에서 나오지만 삼거리)만 사이에 둔 곳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포항제철소, 지금의 포스코에서 일하셨다. 그 시절 나는 사고 싶은 장난감을 사지 못해 속상해한 적이 없었고, 외식이나 학원비 문제로 부모님이 고민하는 모습을 본 기억도 없다. 사고 싶은 걸 못 산 기억은 거의 없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부족한 것도 많았다.
우리가 살던 집은 3층짜리 아파트였다. 사원 아파트였고, 이웃들 직장도 대부분 같았다. 직장이 달라도 포스코 관련 회사였다. 그땐 이웃들을 다 알고 지냈다. 이웃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이웃집에 맡겨졌다. 우리 집에 일이 생기면 바로 이웃집 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었고, 반대로 우리 집도 옆집 아이를 종종 맡아주곤 했다.
우리는 3층 중 1층에 살았다. 아파트였지만, 연탄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구마를 자주 구워주셨다. 나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고구마를 싫어해 몰래 숨기곤 했다. 1층이라 가끔 쥐가 나오는 기도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삼거리가 근처에 있었다. 삼거리에서 수평축을 넘으면 바로 제철소였고, 수직축으로 들어오면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어린 시절 삼거리에서 오토바이와 차가 부딪히는 장면을 여러 번 봤고, 좌회전 중 충돌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본 날은 하루 종일 밥맛이 없었다. 아무래도 80년대가 지금 사는 시절보다는 운전도 거칠고, 무면허 사람도 많고, 법규도 잘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단 좌회전 사고로 피를 흘리는 사람을 여러 번 봤다. 아이였지만 충격이 컸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부모님의 지인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사는 곳이 매연이 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제철소에서 여과를 하긴 하겠지만, 바로 옆에 살고 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었고, 부모님도 그러했다.
내가 사는 곳은 포항 공항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도보나 차로 가깝다기 보다는 비행기 기준으로 가깝다는 거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는, 우리 집에서 비행기를 보면 바퀴가 비행기에서 나오는걸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던 비행기의 뱃속에서 바퀴가 스르륵 나오는 순간은, 마치 마법 같았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면 어른들은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곤 했다.
우리 아파트 앞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다. 소나무 숲에는 벤치 프레스가 있었는 데, 그 당시에는 그냥 역기라고 불렀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하지 못했다. 그 숲에는 여름철만 되면 매미 애벌레가 참 많았다. 유치원 정도 때부터 매미를 잡을 수 있는 철이 되면 매미를 정말 엄청나게 잡았다. 나이가 들며 매미를 잡는 게 양심에 찔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매미 채집을 멈췄다. 매일같이 매미를 잡다 보니, 혹시 내가 매미를 멸종시킨 건 아닐까, 어린 마음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벌레가 우화하는 걸 집에서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어른들 눈엔 제철소 옆이라 공기가 나쁘고, 비행기 소리도 시끄러웠던 동네였다. 하지만 나는 방학만 되면 매일 아침 일찍 소나무 숲으로 달려가 매미 애벌레를 찾았고, 잡은 매미가 우화하는 모습을 집에서 지켜보는 게 하루의 하이라이트였다. 이웃 간에도 왕래가 많았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술래잡기를 했고, 전봇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일은 어디서 놀지 회의하곤 했다.
지금은 그 아파트가 사라졌다. 내가 고구마를 숨겼던 부엌 자리와 매미가 우화하던 그 작은 베란다가, 지금은 이마트 주차장의 차가운 아스팔트가, 그 따뜻한 기억 위를 덮고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린 나는 매미를 멸종시킬 뻔했다
나는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그 당시 포항제철소와 도로 하나(아래 글에서 나오지만 삼거리)만 사이에 둔 곳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포항제철소, 지금의 포스코에서 일하셨다. 그 시절 나는 사고 싶은 장난감을 사지 못해 속상해한 적이 없었고, 외식이나 학원비 문제로 부모님이 고민하는 모습을 본 기억도 없다. 사고 싶은 걸 못 산 기억은 거의 없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부족한 것도 많았다.
우리가 살던 집은 3층짜리 아파트였다. 사원 아파트였고, 이웃들 직장도 대부분 같았다. 직장이 달라도 포스코 관련 회사였다. 그땐 이웃들을 다 알고 지냈다. 이웃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이웃집에 맡겨졌다. 우리 집에 일이 생기면 바로 이웃집 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었고, 반대로 우리 집도 옆집 아이를 종종 맡아주곤 했다.
우리는 3층 중 1층에 살았다. 아파트였지만, 연탄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구마를 자주 구워주셨다. 나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고구마를 싫어해 몰래 숨기곤 했다. 1층이라 가끔 쥐가 나오는 기도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삼거리가 근처에 있었다. 삼거리에서 수평축을 넘으면 바로 제철소였고, 수직축으로 들어오면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어린 시절 삼거리에서 오토바이와 차가 부딪히는 장면을 여러 번 봤고, 좌회전 중 충돌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본 날은 하루 종일 밥맛이 없었다. 아무래도 80년대가 지금 사는 시절보다는 운전도 거칠고, 무면허 사람도 많고, 법규도 잘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단 좌회전 사고로 피를 흘리는 사람을 여러 번 봤다. 아이였지만 충격이 컸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부모님의 지인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사는 곳이 매연이 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제철소에서 여과를 하긴 하겠지만, 바로 옆에 살고 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었고, 부모님도 그러했다.
내가 사는 곳은 포항 공항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도보나 차로 가깝다기 보다는 비행기 기준으로 가깝다는 거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는, 우리 집에서 비행기를 보면 바퀴가 비행기에서 나오는걸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던 비행기의 뱃속에서 바퀴가 스르륵 나오는 순간은, 마치 마법 같았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면 어른들은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곤 했다.
우리 아파트 앞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다. 소나무 숲에는 벤치 프레스가 있었는 데, 그 당시에는 그냥 역기라고 불렀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하지 못했다. 그 숲에는 여름철만 되면 매미 애벌레가 참 많았다. 유치원 정도 때부터 매미를 잡을 수 있는 철이 되면 매미를 정말 엄청나게 잡았다. 나이가 들며 매미를 잡는 게 양심에 찔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매미 채집을 멈췄다. 매일같이 매미를 잡다 보니, 혹시 내가 매미를 멸종시킨 건 아닐까, 어린 마음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벌레가 우화하는 걸 집에서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어른들 눈엔 제철소 옆이라 공기가 나쁘고, 비행기 소리도 시끄러웠던 동네였다. 하지만 나는 방학만 되면 매일 아침 일찍 소나무 숲으로 달려가 매미 애벌레를 찾았고, 잡은 매미가 우화하는 모습을 집에서 지켜보는 게 하루의 하이라이트였다. 이웃 간에도 왕래가 많았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술래잡기를 했고, 전봇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일은 어디서 놀지 회의하곤 했다.
지금은 그 아파트가 사라졌다. 내가 고구마를 숨겼던 부엌 자리와 매미가 우화하던 그 작은 베란다가, 지금은 이마트 주차장의 차가운 아스팔트가, 그 따뜻한 기억 위를 덮고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린 나는 매미를 멸종시킬 뻔했다
나는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그 당시 포항제철소와 도로 하나(아래 글에서 나오지만 삼거리)만 사이에 둔 곳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포항제철소, 지금의 포스코에서 일하셨다. 그 시절 나는 사고 싶은 장난감을 사지 못해 속상해한 적이 없었고, 외식이나 학원비 문제로 부모님이 고민하는 모습을 본 기억도 없다. 사고 싶은 걸 못 산 기억은 거의 없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부족한 것도 많았다.
우리가 살던 집은 3층짜리 아파트였다. 사원 아파트였고, 이웃들 직장도 대부분 같았다. 직장이 달라도 포스코 관련 회사였다. 그땐 이웃들을 다 알고 지냈다. 이웃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이웃집에 맡겨졌다. 우리 집에 일이 생기면 바로 이웃집 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었고, 반대로 우리 집도 옆집 아이를 종종 맡아주곤 했다.
우리는 3층 중 1층에 살았다. 아파트였지만, 연탄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구마를 자주 구워주셨다. 나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고구마를 싫어해 몰래 숨기곤 했다. 1층이라 가끔 쥐가 나오는 기도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삼거리가 근처에 있었다. 삼거리에서 수평축을 넘으면 바로 제철소였고, 수직축으로 들어오면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어린 시절 삼거리에서 오토바이와 차가 부딪히는 장면을 여러 번 봤고, 좌회전 중 충돌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본 날은 하루 종일 밥맛이 없었다. 아무래도 80년대가 지금 사는 시절보다는 운전도 거칠고, 무면허 사람도 많고, 법규도 잘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단 좌회전 사고로 피를 흘리는 사람을 여러 번 봤다. 아이였지만 충격이 컸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부모님의 지인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사는 곳이 매연이 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제철소에서 여과를 하긴 하겠지만, 바로 옆에 살고 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었고, 부모님도 그러했다.
내가 사는 곳은 포항 공항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도보나 차로 가깝다기 보다는 비행기 기준으로 가깝다는 거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는, 우리 집에서 비행기를 보면 바퀴가 비행기에서 나오는걸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던 비행기의 뱃속에서 바퀴가 스르륵 나오는 순간은, 마치 마법 같았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면 어른들은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곤 했다.
우리 아파트 앞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다. 소나무 숲에는 벤치 프레스가 있었는 데, 그 당시에는 그냥 역기라고 불렀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하지 못했다. 그 숲에는 여름철만 되면 매미 애벌레가 참 많았다. 유치원 정도 때부터 매미를 잡을 수 있는 철이 되면 매미를 정말 엄청나게 잡았다. 나이가 들며 매미를 잡는 게 양심에 찔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매미 채집을 멈췄다. 매일같이 매미를 잡다 보니, 혹시 내가 매미를 멸종시킨 건 아닐까, 어린 마음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벌레가 우화하는 걸 집에서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어른들 눈엔 제철소 옆이라 공기가 나쁘고, 비행기 소리도 시끄러웠던 동네였다. 하지만 나는 방학만 되면 매일 아침 일찍 소나무 숲으로 달려가 매미 애벌레를 찾았고, 잡은 매미가 우화하는 모습을 집에서 지켜보는 게 하루의 하이라이트였다. 이웃 간에도 왕래가 많았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술래잡기를 했고, 전봇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일은 어디서 놀지 회의하곤 했다.
지금은 그 아파트가 사라졌다. 내가 고구마를 숨겼던 부엌 자리와 매미가 우화하던 그 작은 베란다가, 지금은 이마트 주차장의 차가운 아스팔트가, 그 따뜻한 기억 위를 덮고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린 나는 매미를 멸종시킬 뻔했다
나는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그 당시 포항제철소와 도로 하나(아래 글에서 나오지만 삼거리)만 사이에 둔 곳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포항제철소, 지금의 포스코에서 일하셨다. 그 시절 나는 사고 싶은 장난감을 사지 못해 속상해한 적이 없었고, 외식이나 학원비 문제로 부모님이 고민하는 모습을 본 기억도 없다. 사고 싶은 걸 못 산 기억은 거의 없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부족한 것도 많았다.
우리가 살던 집은 3층짜리 아파트였다. 사원 아파트였고, 이웃들 직장도 대부분 같았다. 직장이 달라도 포스코 관련 회사였다. 그땐 이웃들을 다 알고 지냈다. 이웃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이웃집에 맡겨졌다. 우리 집에 일이 생기면 바로 이웃집 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었고, 반대로 우리 집도 옆집 아이를 종종 맡아주곤 했다.
우리는 3층 중 1층에 살았다. 아파트였지만, 연탄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구마를 자주 구워주셨다. 나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고구마를 싫어해 몰래 숨기곤 했다. 1층이라 가끔 쥐가 나오는 기도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삼거리가 근처에 있었다. 삼거리에서 수평축을 넘으면 바로 제철소였고, 수직축으로 들어오면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어린 시절 삼거리에서 오토바이와 차가 부딪히는 장면을 여러 번 봤고, 좌회전 중 충돌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본 날은 하루 종일 밥맛이 없었다. 아무래도 80년대가 지금 사는 시절보다는 운전도 거칠고, 무면허 사람도 많고, 법규도 잘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단 좌회전 사고로 피를 흘리는 사람을 여러 번 봤다. 아이였지만 충격이 컸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부모님의 지인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사는 곳이 매연이 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제철소에서 여과를 하긴 하겠지만, 바로 옆에 살고 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었고, 부모님도 그러했다.
내가 사는 곳은 포항 공항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도보나 차로 가깝다기 보다는 비행기 기준으로 가깝다는 거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는, 우리 집에서 비행기를 보면 바퀴가 비행기에서 나오는걸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던 비행기의 뱃속에서 바퀴가 스르륵 나오는 순간은, 마치 마법 같았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면 어른들은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곤 했다.
우리 아파트 앞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다. 소나무 숲에는 벤치 프레스가 있었는 데, 그 당시에는 그냥 역기라고 불렀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하지 못했다. 그 숲에는 여름철만 되면 매미 애벌레가 참 많았다. 유치원 정도 때부터 매미를 잡을 수 있는 철이 되면 매미를 정말 엄청나게 잡았다. 나이가 들며 매미를 잡는 게 양심에 찔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매미 채집을 멈췄다. 매일같이 매미를 잡다 보니, 혹시 내가 매미를 멸종시킨 건 아닐까, 어린 마음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벌레가 우화하는 걸 집에서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어른들 눈엔 제철소 옆이라 공기가 나쁘고, 비행기 소리도 시끄러웠던 동네였다. 하지만 나는 방학만 되면 매일 아침 일찍 소나무 숲으로 달려가 매미 애벌레를 찾았고, 잡은 매미가 우화하는 모습을 집에서 지켜보는 게 하루의 하이라이트였다. 이웃 간에도 왕래가 많았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술래잡기를 했고, 전봇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일은 어디서 놀지 회의하곤 했다.
지금은 그 아파트가 사라졌다. 내가 고구마를 숨겼던 부엌 자리와 매미가 우화하던 그 작은 베란다가, 지금은 이마트 주차장의 차가운 아스팔트가, 그 따뜻한 기억 위를 덮고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린 나는 매미를 멸종시킬 뻔했다
나는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그 당시 포항제철소와 도로 하나(아래 글에서 나오지만 삼거리)만 사이에 둔 곳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포항제철소, 지금의 포스코에서 일하셨다. 그 시절 나는 사고 싶은 장난감을 사지 못해 속상해한 적이 없었고, 외식이나 학원비 문제로 부모님이 고민하는 모습을 본 기억도 없다. 사고 싶은 걸 못 산 기억은 거의 없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부족한 것도 많았다.
우리가 살던 집은 3층짜리 아파트였다. 사원 아파트였고, 이웃들 직장도 대부분 같았다. 직장이 달라도 포스코 관련 회사였다. 그땐 이웃들을 다 알고 지냈다. 이웃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이웃집에 맡겨졌다. 우리 집에 일이 생기면 바로 이웃집 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었고, 반대로 우리 집도 옆집 아이를 종종 맡아주곤 했다.
우리는 3층 중 1층에 살았다. 아파트였지만, 연탄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구마를 자주 구워주셨다. 나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고구마를 싫어해 몰래 숨기곤 했다. 1층이라 가끔 쥐가 나오는 기도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삼거리가 근처에 있었다. 삼거리에서 수평축을 넘으면 바로 제철소였고, 수직축으로 들어오면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어린 시절 삼거리에서 오토바이와 차가 부딪히는 장면을 여러 번 봤고, 좌회전 중 충돌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본 날은 하루 종일 밥맛이 없었다. 아무래도 80년대가 지금 사는 시절보다는 운전도 거칠고, 무면허 사람도 많고, 법규도 잘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단 좌회전 사고로 피를 흘리는 사람을 여러 번 봤다. 아이였지만 충격이 컸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부모님의 지인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사는 곳이 매연이 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제철소에서 여과를 하긴 하겠지만, 바로 옆에 살고 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었고, 부모님도 그러했다.
내가 사는 곳은 포항 공항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도보나 차로 가깝다기 보다는 비행기 기준으로 가깝다는 거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는, 우리 집에서 비행기를 보면 바퀴가 비행기에서 나오는걸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던 비행기의 뱃속에서 바퀴가 스르륵 나오는 순간은, 마치 마법 같았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면 어른들은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곤 했다.
우리 아파트 앞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다. 소나무 숲에는 벤치 프레스가 있었는 데, 그 당시에는 그냥 역기라고 불렀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하지 못했다. 그 숲에는 여름철만 되면 매미 애벌레가 참 많았다. 유치원 정도 때부터 매미를 잡을 수 있는 철이 되면 매미를 정말 엄청나게 잡았다. 나이가 들며 매미를 잡는 게 양심에 찔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매미 채집을 멈췄다. 매일같이 매미를 잡다 보니, 혹시 내가 매미를 멸종시킨 건 아닐까, 어린 마음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벌레가 우화하는 걸 집에서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어른들 눈엔 제철소 옆이라 공기가 나쁘고, 비행기 소리도 시끄러웠던 동네였다. 하지만 나는 방학만 되면 매일 아침 일찍 소나무 숲으로 달려가 매미 애벌레를 찾았고, 잡은 매미가 우화하는 모습을 집에서 지켜보는 게 하루의 하이라이트였다. 이웃 간에도 왕래가 많았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술래잡기를 했고, 전봇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일은 어디서 놀지 회의하곤 했다.
지금은 그 아파트가 사라졌다. 내가 고구마를 숨겼던 부엌 자리와 매미가 우화하던 그 작은 베란다가, 지금은 이마트 주차장의 차가운 아스팔트가, 그 따뜻한 기억 위를 덮고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