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2』마흔한 번째 장면

by 박재한
1953.07.27 휴전협정, 해리슨 주니어 중장 (미국) 남일 장군(오른쪽)Korean_War_armistice_agreement_1953.jpg

<1953.07.27 휴전협정, 해리슨 주니어 중장 (미국) 남일 장군(오른쪽)

Korean_War_armistice_agreement_1953,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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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파죽지세로 북한군을 몰아낸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 평양을 탈환하고 앞록강과 두만강 근처까지의 북한 지역을 탈환하게 되었다. 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중공군의 투입으로 전선은 급격하게 후퇴하게 된다. "항미원조 보가위국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돕고 집을 지키며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라는 명목하에 투입된 중공군은 압도적인 물량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했다. 10월에만 8개의 사단(18만 명의 규모)이 공격하였으며, 11월에는 12개 사단(12만 명의 규모)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밀고 들어갔다. (중공군 개입, 국가기록원)


후퇴를 거듭한 국군은 평양을 내주었으며, 서울까지 다시 빼앗기게 되는 등 (1.4 후퇴) 전세는 다시 북한에게로 넘어가는 듯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는 흥남 철수작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아닐까 싶다.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놓은 원산과 흥남 일대의 도시의 주민들은 몸을 피하기 위해 국군과 유엔군이 피난 가는 배에 올라탔고, 무사히 한국으로 도착하였다. 이때 대략 20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고,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으며, 이로 인해 부산은 급격히 도시가 커지고 여러 출신의 사람들이 섞이는 도시로 변모하였다. 그러면서 <국제시장>과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음악과 영화의 배경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전열을 가담고 중공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가열찬 전투를 벌였다. 결국 전선은 38도 선을 기준으로 뺏고 빼앗기는 참혹한 줄다리기로 전쟁의 양상이 진행되게 된다. 결국 휴전 협정을 위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휴전협정을 조인할 때의 전선을 휴전선으로 하자는 협정에 의하여 영화 <고지전>과 같이 산 하나를 쟁취하기 위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참혹한 고지전이 지속되게 된다. 이런 와중인 1953년 3월 경 스탈린이 갑작스레 사망하며 휴전 협정이 진척된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정에 대해서 큰 반발을 하고 있었다. 휴전보다는 압록강으로 진격하는 게 더 맞다고 호소하였고 휴전반대운동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측은 휴전에 동의하였고, 결국 제네바 협약에 따른 포로 교환에 대한 합의를 보게 됨으로써 휴전이 코앞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북진통일을 하겠다는 국회 결의안을 통과시킨 후에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권을 미국에서 한국으로 환수를 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미군은 이를 반대하였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보다 유엔군과 공산군 동시 철병과 동시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제안을 던지게 된다. 미국이 이를 반응하지 않자 이승만 대통령은 기존 유엔군과 북한 측이 합의했던 포로교환 협정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위해 한국에 있는 반공포로를 석방시키게 된다. 반공포로의 수는 약 총 3만 5천 명이었는데 이중 2만 7천여 명이 탈출하게 된다. (반공포로 석방,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미국은 한국전쟁의 휴전을 원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젊은 미국인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175만여 명의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여하였으며, 3만 7천 명이 전사했다.) 북한의 재침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미국과의 군사동맹 없이는 휴전이 없다는 것을 단호하게 피력하였고, 결국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약속하며 휴전협정에 서명을 하게 된다. (한국전쟁,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휴전 협정 문서에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공산군 대표 남일과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 중공군총사령관 팡더화이의 서명이 있을 뿐,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서명은 없다. 휴전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한국전쟁 3년으로 한국은 공업시설의 40%가 잿더미가 되었으며, 북한은 전력의 74%, 기타 공업에 70%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모든 인프라가 Reset(초기화)된 것이다.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와 군사정전위원회편람을 보면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한국군과 유엔군은 전사자만 17만 명, 부상자는 55만 명에 달했으며, 실종자는 4만여 명에 달했다. 북한군과 중공군 또한 전사자만 63만 명, 부상자는 34만 명이며, 실종자는 14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피난민은 240만 명, 미망인은 20만 명, 고아는 10만 명이 발생했고, 민간인 피해도 100만여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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