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 취임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3』육십 세 번째 장면

by 박재한
1993.02.25 김영삼 대통령 취임 [위키 커먼즈, 퍼블릭 도메인] 1993.02.25-1998.02.24 클린턴 대통령과.jpg

<김영삼과 클린턴 대통령, 퍼블릭 도메인>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거대여당 민주자유당의 3대 총재는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일념하에 신군부 잔당과 손을 잡았고, 구군부 세력의 일부이자 충청도의 표심을 가지고 있었던 김종필과도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김영삼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14대 대선의 승리를 위해 내린 결단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14대 대선에는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현대그룹의 회장인 정주영의 대선 출마였다. 정주영은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통일국민당에 국민적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 개그맨 이주일과 배우 강부자, 최불암이 통일국민당 당명으로 총선에 나서며 이른바 통일국민당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14대 총선에서 통일국민당은 31석을 확보하며 독보적인 제3당의 입지를 갖췄다.) 92년 통일국민당의 돌풍에 힘입어 정주영은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였고, 반값 아파트 공약, 국가보안법 폐지, 경부고속도로 복층화 사업,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와 중학교 전면 무상급식 등의 파격적인 공약을 제시하며 대선에서도 돌풍을 이어가려고 하였다. 게다가 대선 당시에는 통일국민당 당원이 천만명을 돌파하며 대통령 당선이 가까워지는 듯하였다. 한편 김대중도 민주당 소속으로 대선출마를 공식화하였다.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은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던 여당 소속의 대통령 후보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결과는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선 후보의 당선이었다. 김영삼 후보가 약 997만 표(41.96%)를 획득하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반면 김대중 후보는 800만여 표(33.82%)를 받으며 낙선하였고, 천만 당원을 앞세웠던 정주영은 380만 표(16.31%)를 받으며 큰 차이로 낙선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여지없이 지역구도가 강화된 결과값이 도출되었다. 김영삼은 자신의 고향인 부산, 경남에서는 73%, 72%를 득표하였고, 그 외의 지역에서도 상대적 강세를 보였다. 특히 노태우의 고향이기도 한 대구, 경북에서 50% 이상을 득표하며 많은 표를 본진에서 획득하였다. 정주영은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많은 표를 얻었다. 이는 정주영과 어느 정도 연고가 있는 지역이었기에 20%에서 35% 사이를 득표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중 후보 또한 광주와 전북, 전남에서 90% 정도의 표를 몰아 받았으나, 나머지 지역에서 30% 수준의 표를 받으며 낙선하였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며 대한민국은 문민정부 출범을 공식적으로 대외에 천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이후로 지속되었던 군인의 통치가 끝나고 군인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신군부 세력이었던 하나회를 해체하고, 역사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발시키고 경복궁을 원래의 장소로 돌려놓음과 동시에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를 실시하며 선진국 수준의 경제기반을 갖추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4.19 혁명, 부마민주화운동,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재평가 및 기념일 지정을 통해 민주화 운동이 결실을 맺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도 성사되었으나, 성사된 이후 김일성이 죽으며 아쉽게 남북정상회담은 물 건너가게 된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 시기에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사건이 터지며 국민적 불안감을 상승시켰으며, 외화자본이 급격하게 유출되며 국가적 경제 위기를 봉착하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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