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스물두 번째 장면

by 박재한
1919.04.11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사진은 임시정부 수립 2주년 기념 사진) After_First_New-year_Commemoration_of_Provisional_Government_of_the_Republic_of_Korea_(1st_January_1920).jpg

<임시정부 수립 2주년(1920) 신년 기념촬영, 퍼블릭 도메인>


1919년 3월 1일부터 2-3개월 동안 발생한 3.1 운동은 민족사적으로,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에서는 통일된 독립운동 세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고, 세계 각국에 산발적으로 설립된 임시정부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설립하자는 논의가 뜨겁게 이어지게 된다. 그래야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벌일 수 있고,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통일된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한성정부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을 하던 대한국민의회,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되어 활동하는 상해 임시정부와 더불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논의를 이어갔고, 결국 한성정부의 내각을 수용하고 상하이에서 활동을 하기로 합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4월 11일에 수립하게 된다.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제정된 날이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체제를 민주공화제로 명시하였기에 상징적인 날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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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채색화>


통일된 임시정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는 점, 한국인의 첫 민주공화정 정부라는 점에서는 상징적이다. 허나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열강의 시선에서는 우리를 그리 각별하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파 지도자로서 독립운동을 외교를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독립운동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국제 연맹이 한국을 통치해 달라는 위임통치 청원서가 전달되었다는 소식이 임시정부 내부에 알려지자 수많은 반발이 나왔고 내분이 발생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향후 방향성에 대해 논하고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의논하였다.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었는데 그 세력은 창조파 세력(무장독립운동을 중심으로 펼쳐야 한다는 세력)과 개조파(실력 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일구어야 한다는 세력)이다. 결과적으로 국민대표회의는 결과를 내지 못했고, 일부 세력이 이탈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탄핵당했다. 이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힘을 잃어가게 되었다. 힘을 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다시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니 그 이후의 <장면>에서 확인해 주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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