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스물한 번째 장면
<1919.03.01 3.1 운동, 퍼블릭 도메인 Red_Cross_pamphlet_on_March_1st_Movement_(KADA-shyun15-012~10)>
미합중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모든 민족은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한다.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들의 식민지들을 향하여 독립을 하고 싶으면 하라는 이야기인지라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히 들어있다고는 하지만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민족 자결주의는 꽤나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또한 여운형이 만든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로 파견하여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하였으며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는 2월 8일 독립 선언서를 읽으며 독립의 열풍은 식민지가 된 지 9년 만에 폭발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한민족의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고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약속하고 있다. 말미에는 결의문 4개 항이 제시되어 있는데, ① 한일병합조약의 폐기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② 민족대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③ 만국평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할 것이며, ④ 이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영원한 혈전을 벌일 것을 선언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3·1 독립선언서」와 다른 점이다. (2.8 독립선언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AI 채색화>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사회에는 독살(암살) 의혹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이로 인한 불안과 분노 속에서 독립 의지가 한층 고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종의 인산일을 전후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했으며, 학생과 시민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탑골공원에는 약 4,000~5,000명이 운집한 것으로 전해지며,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어 3월부터 4월까지 이어졌고, 참여 규모는 일본 측 추정 약 110만 명, 다른 자료에서는 약 200만 명으로도 언급된다. 당시 약 1,500 만명 정도 인구를 추정하는데 10% 이상의 국민이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