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919년 11월 9일
의열단 창설과 무장투쟁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스물네 번째 장면

by 박재한
1919.11.09 의열단 창설 (김원봉) 퍼블릭 도메인.jpg

<의열단 김원봉의 모습, 퍼블릭 도메인>


만세 운동 이후 1919년 11월 만주 지역에서 김원봉이 필두로 의열단이 조직되었다. 후에는 민족주의 급진파의 모습을 띤 조직으로 발전하였으나 초기 의열단은 일본 제국을 항하여 무장 투쟁을 통해서 독립을 이뤄야 된다는 생각으로 모인 조직이라 굵직굵직한 독립운동을 남긴 조직으로 유명하다. 의열단의 성격과 특징을 알고 싶으면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과 행동강령이 나타나있는 조선혁명선언을 읽어보자. (참고로 조선혁명선언은 신채호 선생님이 만들었다.)


신흥 무관학교에서 폭탄제조법을 배웠었던 김원봉과 의열단원은 일제에 부역하거나 일제의 요체에 해당되는 건물에 폭탄을 터트리기로 계획한다. 다음은 의열단원들의 주요 활약을 정리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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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채색화> 아래에 나오는 모든 사진은 퍼블릭 도메인에 속한 사진임을 명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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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옥 1889-1923 /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 창문을 향해 폭탄을 던졌고 실수 없이 폭탄은 터졌다. 이후 인근 집에 들어가 몸을 숨겼으나 한인 순사에 의하여 은식처가 드러났다. 이후 일본 경찰과의 총격전이 발생하였는데, 김상옥 의사의 사격술이 너무 정확하여 일본 경찰이 애를 먹었다. 결국 400여 명의 무장경찰이 김상옥 의사를 둘러쌓았고, 김상옥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접전을 벌인 후 총알이 떨어지자 자결하였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상옥,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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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봉 1898-1958(?) / 의열단 단장

의열단 단장을 맡은 김원봉은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등의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진두지휘하였다. (김원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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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익상 1895-1941 / 조선총독부 폭탄 의거

김원봉 의열단장의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총독부에 잠입하기 위해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2층 비서과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를 총독실로 오인하였다고 한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이후 틈을 이용하여 몸을 피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육군 대장 다나카가 상해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암살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겼으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김익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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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1885-1928 / 일본 왕궁 폭탄 의거

도쿄에 위치한 왕궁을 폭파할 계획으로 도쿄로 조심스래 이동한 후에 왕궁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고 말았고, 김지섭 의사는 체포당한다.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바형무소에서 옥고 하였다. (김지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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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석주 1892-1926 /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의거

의거 당일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고, 나석주는 곧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로 이동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정문에 들어가면서 권총을 쏘아 앞에 앉아있던 기자를 쓰러뜨렸고, 2층에 올라가 토지개량부 과장과 차석에게 총을 쐈다. 이후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이후 자결을 시도하였고, 병원에서 끝내 순국하였다. (나석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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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혁 1895-1921 /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

부산경찰서로 찾아가 서장 하시모토를 만난 후에 봇짐 안에 들어있던 폭탄을 꺼내 투척하였다. 부산경찰서장은 중상을 입은 하시모토는 끝내 사망하였다. 박재혁 의사도 옥고 중 고문과 폭탄 투척 때 입은 피해로 인하여 순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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