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의 음악> 전복들 인터뷰
고창일은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저는 욕심이 많아요. 이것저것 시도하는 걸 좋아하죠.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보이면 도전하는 편이에요.” 그는 새로운 일을 벌이고 힘닿는 곳까지 열정을 쏟는다.
고등학교 때는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기자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운 좋게 되더라도 먹고살기 막막한 직업이라는 걸 알게 됐죠. 대학에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했어요. 타고난 성향과 정반대인 공부였죠. 나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분야가 재밌을 것 같았어요. 저는 낯선 것과 친해지는 걸 좋아하거든요.
주어진 환경에 자기를 맞춘다는 그는 전공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노력이 생계로 이어졌다. 일하며 안정적으로 생활을 꾸릴 수 있었다. 그 반대편에 음악이 있었다.
음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을 휴학하고 밴드 생활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직업으로서의 음악가가 지닌 한계를 느꼈어요. 생활과 음악을 분리하기로 마음먹었죠. 공부와 음악 두 가지를 모두 해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요.
음악을 언제 시작했느냐고 물으면 쉽게 답하기 어려워요. 어느 한때를 콕 집어 얘기하기 어렵거든요. 저는 음악가가 무대에서 내뿜는 에너지에 열광했어요.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함께 음악을 듣는 그 순간이 좋았어요. 돌아보면 무대에 선 이의 에너지와 듣는 이의 에너지가 맞닿는 순간을 좋아했던 거 같아요. 제가 무대에 서는 사람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죠.
그는 페스티벌 일정에 맞춰 연차를 쓰곤 했다. 공연 특유의 분위기와 힘에 이끌렸다. 언젠가부터 “나도 무대 위에 서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싱어송라이터 엘리엇 스미스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와 같은 예술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말하곤 했죠. 종종 어떤 음악가처럼 노래해 보라고 권하기도 했어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오기 같은 게 생겼거든요.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고 싶진 않았어요.
“밴드를 믿지 않을 때 청춘은 죽었다고 생각해.”
이 말이 밴드 음악을 시작한 계기예요.
박은아는 어릴 때부터 음악과 가까웠다. 교회에서 반주를 하고 학교에서는 합창부와 오케스트라 활동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된 그는 일본 밴드 카시오페아(カシオペア)의 베이시스트 나루세 요시히로를 동경했다. “나루세처럼 멋지게 연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고 웃었다.
처음 맡은 동아리가 밴드부였어요. 초임 교사이기도 하고 음악을 할 줄 안다고 하니까 밴드부를 맡긴 거죠. 학생들을 지도하며 외부 강사를 초청하곤 했어요. 베이스를 연주하려는 학생이 있었는데 악기가 없어서 집에 묵혀둔 가와사미 베이스를 빌려줬죠. 다른 사람이 그 기타를 연주하는 걸 보니 왠지 마음이 뒤숭숭하더라고요. 실력이 늘어가는 학생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죠.
연주하고 싶었어요.
무대에서요.
김경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기타를 접했다. 음악 수행평가 시간에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연주했다.
그 곡에 B마이너 코드가 있거든요. 보통 G⁷ 코드로 대신 잡기도 해요. 저는 원래 코드로 연주하고 싶었어요. 연습을 엄청 했어요. 기타 학원에 다니기도 했고요.
고등학교 3학년 무렵에는 어느 정도 기타를 다룰 수 있게 됐다. 아는 형의 제안으로 밴드 생활도 시작했다. “무대에서 다섯 곡 정도를 불렀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무대에서 몸을 흔들다가 안경이 날아가버렸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죠. 그저 음악에 몰입했어요. ‘음악이 내 길이다.’ 하고 결심한 건 아니었지만 그때 어렴풋이 예감했어요.
내 인생에서 음악을 뗄 수 없겠다.
☑ 오랫동안 활동한 밴드인 만큼 멤버 변화도 있었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밴드를 이끄는 고창일님의 음악 서사는 밴드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거 같아요.
첫 공연을 신촌 롤링스톤즈에서 했어요. 서울대학교 법대 밴드랑 같이 했는데 대학 내에선 이미 유명했어요. 공연장이 가득 찰 정도로요. 그 공연을 준비하며 많이 힘들었죠. 당시 저는 곡을 쓸 줄 몰랐거든요. 노래만 불러야 했어요. 감정이입이 어려웠어요. 밴드 멤버들이 용기를 불어넣어 줬기에 가능했죠.
그날을 시작으로 홍대 공연장에서 활동했어요. ‘오늘’이라는 밴드로요. 그때 했던 음악을 음원으로 만들지 않은 게 아쉬워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금방 해체했거든요. 그만두고 대구로 돌아왔는데 상실감이 컸어요. 다시는 음악을 하고 싶지 않았죠.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때 원정씨가 손을 내밀었죠. 대구에서 음악을 해보지 않겠냐고요. 2010년은 전복들이 시작한 해이자 제가 다시 일어난 해예요.
☑ 밴드가 결성되고 6년 만에 첫 싱글 「봄나물」을 발표했어요. 꽤 긴 시간 동안 음원을 내지 않은 이유가 있었나요?
드러머가 없어서 제가 드럼 교본을 보며 연습해야 했어요. 우리 팀은 자작곡만 불렀어요. 기초적인 수준의 연주만 할 줄 아니까 공연하기는 편했죠. 더욱더 곡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멤버들은 생각이 달랐어요. 공연을 재밌는 경험 정도로 여겼던 것 같아요. 음악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분위기였죠. 되돌아보면 기대보다는 의심이 더 강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고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어요. 결혼을 하거나 이사를 가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요. 저와 원정씨만 남게 됐어요. 이대로 그만두고 싶지 않았죠. 그동안 쌓인 곡이 많았거든요. 우리가 만든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어요. 다시 멤버를 모집했고 얼마간 계속해서 바뀌었어요.
마지막에는 원정씨마저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공연에는 관심이 없던 친구였거든요. 다시 혼자가 되었죠. 음악을 그만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음악을 계속하려고 「봄나물」을 내게 된 거예요.
떠나간 멤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에요. 그들의 이름을 크레딧에 적고 있어요. 각자 다른 욕망으로 시작한 거니까요. 서로의 욕망이 달랐을 뿐 서로가 있었기에 계속할 수 있었어요.
대구를 떠나는 음악가를 여럿 보았어요. 지금은 또래 음악가도 별로 없고요. 그나마 부산은 삼사십 대 음악가가 제법 있는 거 같아요. ‘음악가들이 대구를 떠나는 이유가 뭘까?’ 항상 고민이에요. 결국 듣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음악가에게 듣는 이들은 존재 이유잖아요.
행복하게 작업해야 좋은 음악이 나온다고 믿어요. 서울에서 활동할 때는 불행했어요. 여덟 시간 자고, 여덟 시간 일하고, 여덟 시간 연습했죠. 서울에는 제가 좋아하는 음식도 사람도 없었어요. 행복을 느낄 만한 것들을 찾지 못했죠.
음악가로 성공하려면
행복한 환경에서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역에서 활동할 때 약간의 불편함도 있죠. 인프라가 서울에 비해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럼에도 대구에서 활동하는 게 더 행복해요. 여기에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있어요. 여기서 활동하며 지역 음악계를 탄탄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우리가 지역 음악계에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켰으면 좋겠어요.
많은 동료가 떠났어요. 맥주 한잔하며 음악에 관해 얘기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졌죠. 그들에게 듣는 이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아마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
음악이 사람들을 모았다. 이원정이 돌아왔고 박은아가 합류했다. 드러머를 구할 때였다. 고창일은 기타를 연주하듯 드럼을 치는 음악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기타리스트이자 드러머인 김경래를 알게 됐다.
전복들은 독특하게 구성된 밴드예요. 아마추어리즘을 잘 활용하면 매력적인 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멤버들은 불안했을 거예요. 의심했겠죠. 바로 그런 지점에서 특유의 에너지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무대에서 필사적으로 연주하고 나서 내쉬는 안도의 한숨 같은 거요.
우리가 지향하는 기타 팝 음악에는 사랑스러운 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죠.
서툶이나 불안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잖아요.
모두에게 처음이 있으니까요.
그 순간들을 되돌아보면 사랑스러워요. 그 감정들을 음악에 담고 싶었어요.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성장통을 겪어야 하겠지만요.
☑ 전복들은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허무는 밴드인 거 같아요.
프로와 아마추어의 기준이 불명확하다고 생각해요. 서툴더라도 그게 스타일로 자리 잡고 음악에 잘 묻어난다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함께 작업할 때 구체적인 것들을 제시하지 않는 편이에요. 멤버들의 색깔을 잘 담고 싶거든요.
원정씨의 기타 연주를 좋아해요. 겁 없이 연주하거든요. 모험과 불안 사이에서 솟구치는 그의 연주가 멋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음악이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한 음악이냐고 묻는다면 확실하게 대답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음악이 매력적이라고 자신해요.
☑ ‘기타 팝 요정들’이라고 소개할 만큼 색이 뚜렷해요. 록이라는 장르 안에서 ‘기타 팝’을 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제가 생각하는 팝의 정의는 ‘따라 부름’이에요. 그러려면 곡이 친절해야 해요. 누구나 부를 수 있어야 하니까요. 우리의 음악적 한계가 더 많은 리스너를 음악으로 초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기타 팝은 록의 작법을 따라가면서 팝적인 해석이 들어간 장르예요. 기타가 주가 되기 때문에 기타 팝이죠. 물론 이것은 방법론이라서 어떤 장르라고 딱 잘라 얘기하기는 어려워요.
기타 팝을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가깝죠. 기타 사운드로 연주하고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이라면 기타 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곡의 세부적인 요소는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장르에 갇힐 필요는 없어요. 우리 음악은 특정 장르가 아니에요. 기타 팝이라는 음악적 태도를 취할 뿐이죠.
☑ 2018년 발표한 EP 「우주가 전복해」 소개를 보면 ‘기타 팝 아나키스트’라고 적혀 있어요. “매일 전복하는 삶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달려가는 게 록 밴드다운 삶과 태도”라는 말에 동의해요.
제가 말하는 ‘아나키스트’에는 거창한 의미는 담겨 있지 않아요. 그냥 혼자 두면 행복한 사람이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거우면 그만인 사람이요. 멤버들의 역할도 특별히 규정짓지 않아요. 기타는 이렇게 연주해야 하고 드럼은 저렇게 연주해야 한다는 건 재미없잖아요. 모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밴드이고 싶어요.
뒤집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의 연속이죠. 그런 일상을 반복하며 비스듬하게 서버린 상태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돌아보니 완전한 전복은 없더라고요. 전복됐다가도 다시 땅에 발을 붙이게 되죠. 살아야 하고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하니까요. 전복들이라는 이름은 밴드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에 가까워요. 시간이 흐르면 의미도 바뀔 수 있겠죠. 성장이라면 성장일 테죠.
인간은 계속해서 전복되는 삶을 사는 거 같아요.
☑ 전복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음계를 불안정하게 오르내린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음원 작업에서 불안정한 부분을 바로잡기 마련이잖아요.
음원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했어요. 튠(Tune)이라는 개념도 잘 몰랐으니까요. 첫 싱글 「봄나물」을 작업할 때는 원정씨랑 기타치고 보컬을 입혀서 노래를 만들었죠. 이후 발표한 EP 「우주가 전복해」 같은 앨범은 반대로 너무 스튜디오 느낌이 강했어요. 보컬이라도 날것의 느낌을 내고 싶었어요.
음악에 답을 정해놓고 싶지는 않아요. 의외로 음악에는 수학적인 정답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정해진 수식 안에서 변주를 줄 때 안정적인 음악이 만들어지죠. 그렇다고 수식 바깥에 있는 음악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듣는 이에게 다가가는 게 두렵지 않거든요. 그게 나라는 사람이니까요. 연습을 게을리하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한 결과를 부끄럽게 여기고 싶지 않아요.
☑ 「낡은 지도」는 꼭 우리 모두의 모습 같았어요. 전복들의 음악은 작고 평범한 일상과 맞닿아 있는 거 같아요.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위로’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서로가 오붓하게 기대어 있는 모습이 이상적인 거 같아요. 어느 한쪽이 더 에너지를 쏟는 게 아니고요.
이 곡은 전복들의 서사가 다음 서사로 넘어가는 곡이에요. 몇 번이고 넘어져도 괜찮다고 노래하죠.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어요. 그 모든 실패가 모여 하나의 지도가 만들어진 거죠. 실패가 꼭 나의 삶에서만 빛을 발하는 건 아니에요. 나의 실패 덕분에 다른 누군가는 피할 수도 있으니까요. 「낡은 지도」는 내게 하는 말이에요.
되돌아보니 음악을 하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시간이 많더라고요.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잖아요.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죠. 「낡은 지도」는 그때만 할 수 있는 이야기였어요. 저는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노래했던 거 같아요.
☑ 「We Are Here And Everywhere」은 대구퀴어문화축제 10주년 기념 헌정곡이에요.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멜로디예요.
우리는 친절한 음악을 해요. 그게 기타 팝의 매력이기도 하죠.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마음속에 음악이 있고 표현할 수 있죠. 곡도 쓰고 노래할 수 있고요. 음악의 문턱이 낮아졌으면 좋겠어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어요.
「We Are Here And Everywhere」은 배미나씨가 쓴 가사에 멜로디를 붙인 거예요. 가사를 보고 5분 만에 곡이 나왔어요. 이 노래가 울려 퍼지는 순간을 상상했어요. 퀴어퍼레이드에서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는 장면이요. 한 번 들으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노래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응원가처럼요.
한 친구와 정치에 대해 치열하게 대화한 적이 있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원정씨가 “그래서 ‘빨갱이’라는 말이 좋은 말이야, 나쁜 말이야?” 하고 묻더라고요. 숨이 턱 막혔어요. 단어 하나를 두고 친구와 싸우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어요.
「빨갱이」라는 곡에 “코카콜라 맛있다.” 하는 부분이 있어요.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맛있는 건 나눠 먹자.” 하는 순간 의미가 생기죠. 이 곡이 정치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단지 단어 하나에 색을 입히는 시선을 경계할 뿐이에요.
어떤 주제로든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검열하고 싶지 않아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메시지를 담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게 되는 게 두려운 일이죠.
박은아는 “포근한 동네 밴드”를 하겠다는 고창일의 말이 좋았다. 생활을 유지하며 음악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전업 음악가는 아니지만 “다정하고 친절한 이웃” 같은 밴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일씨의 꿈은 동네 울타리 너머에 있는 거 같아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토대는 동네 밴드예요. 제가 전복들에 들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요.
김경래는 기타 학원에서 일하며 남는 시간에 드럼을 배웠다.
기타 학원에 죽치고 앉아 있던 때가 있었어요. 스무 살이 되고 시간도 많았죠. 어느날 학원 원장님이 학원 관리를 제안했어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연습할 수 있었거든요. 그때 연습한 게 드럼이었어요.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쳤죠. 그러다가 악보를 보고 연습했어요. 말 그대로 서당 개처럼 배운 거예요. 대구 음악계가 그리 넓지 않아요. 금세 소문이 나거든요. 창일씨한테 연락이 왔을 때 놀랐어요. 드러머 할 생각이 없냐고 연락이 왔으니까요. 행운이었던 거 같아요. 삶과 음악에 관해 고민하던 때였거든요. 주변에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종종 뛰어난 음악가를 보면 부러웠어요. 거리감이 느껴졌죠.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때마침 전복들에 합류하게 된 거죠.
☑ 멤버 구성이 다채로워요. 십 년 넘게 음악을 한 멤버도 있고 비교적 음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멤버도 있죠. 리더로서 밴드를 이끄는 데 고민이 많을 거 같아요.
밴드와 함께한 시간만큼 많은 경험이 쌓였어요. 시행착오도 겪었고요. 가끔 입이 근질근질해요. 더 나은 길을 알려줄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만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물론 다른 멤버들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어요. 리더의 역할에 관해 자주 고민해요. 앞장설 때도 있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아요.
음악적인 견해 차이는 오히려 쉽게 해결할 수 있어요. 멤버들과 합주하면서 자연스레 바뀌니까요. 전복들이 지나온 시간과 통과하는 시간을 음악으로 잇기만 하면 돼요. 과거와 현재의 전복들이 만든 음악이 무대에서 흐를 때 힘이 생긴다고 믿어요.
☑ 「할머니 소파」는 박은아님이 노래했어요. 고창일님이 아닌 다른 보컬로 발표된 음원은 아직 유일한 거 같아요.
이전 멤버 성현씨와 했던 마지막 공연이 끝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성현씨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였거든요. 이 곡에 담긴 서사를 새로운 멤버들과는 함께할 수 없을 거라고요. 이야기의 주인공이 드럼을 치고 그 이야기를 곁에서 지켜본 이들이 연주하고 노래하던 곡이었으니까요.
이 곡을 다시 하려면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어요. 보컬을 은아씨에게 제안한 것도 비슷한 의도였어요. 주인공이 바뀌면 다른 이야기가 되니까요. 경래씨가 기타를 연주했고 저는 탬버린을 쳤어요. 성현씨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저뿐이었죠. 뒤로 물러나 새롭게 해석된 「할머니 소파」를 오롯이 듣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이 곡의 완성은 뮤직비디오라고 생각해요. 은아씨가 노래한 「할머니 소파」에 촬영감독인 영민씨의 해석이 더해진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이죠.
☑ 밴드에서 역할을 바꾸는 건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은아씨가 노래하는 곡인만큼 「할머니 소파」의 주인공은 베이시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베이스 라인이 곡을 이끌게 하고 싶었죠. 작업하는 데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어요. 은아씨가 만든 베이스 라인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했어요. 여러 개의 라인을 조화롭게 구성하는 식으로요.
박은아는 처음 보컬 제안을 받았을 때 머리가 복잡했다고 털어놓았다.
제 목소리 톤이 가벼운 편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이 곡의 무게와 맞지 않을 거 같았어요. 코러스가 반복하는 부분은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죠. 일단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는 마음으로 녹음했어요. 베이스 라인을 작업할 때도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새로 라인을 구성하거나 멜로디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었어요.
「전복코믹스」는 고창일이 딸을 생각하며 만든 EP 앨범이다. 그는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상상하며 곡을 썼다고 했다. 「홍차왕자」는 순정만화 주인공을 꿈꾸던 십 대의 이야기이고 「투명인간」은 짝사랑에 빠진 이십 대의 이야기다. 「꽃병 속 꽃은 뿌리가 없다」는 삼십 대 흔들리는 청춘을 노래한다. 「이 밤은 널 좋아하니」는 그 모든 서사의 마침표다. 인생 막바지에 이르러 사랑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여정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음악은 결국 누군가 듣고 공감할 수 있어야 의미가 생겨요. 음악가와 듣는 이가 만나는 지점이 필요하죠. 프로듀싱을 맡은 단편선은 제게 숙제를 남겼어요. 듣는 이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고민해보라는 뜻이었죠. 정곡을 찔렀어요. 그 모습에 믿음이 가더라고요. 이 사람과 작업하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았죠. 그래서 그에게 앨범 프로듀싱을 부탁했어요.
☑ 전복들 멤버의 얼굴을 일러스트로 표현한 앨범 커버가 인상 깊어요.
다른 커버 이미지도 생각했지만 멤버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어요. 전복들 하면 고창일을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아요. 이번 앨범을 통해 멤버들의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멤버 소개나 인터뷰 콘텐츠를 만든 이유죠.
초창기 전복들은 서로의 의견을 치열하게 주고받던 팀이었어요. 누군가 아이디어를 가져오면 각자의 의견을 덧붙여 곡을 완성했죠. 한 곡을 두고 여러 사람이 논의하면 새로운 창작물이 되기도 해요. 그런 방식으로 계속 작업하고 싶어요. 멤버들의 개성이 드러나야 지속성 있게 밴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마다의 매력이 한데 모여 커다란 힘이 된다고 믿어요.
김경래는 「전복코믹스」의 드럼 사운드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드럼을 친 시간이 짧았어요. 곡의 흐름이나 구성 같은 게 아니라 연주가 아쉬운 거죠. 드럼이 흔들리면 다른 멤버도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고민이 많아요. 드러머로서는 아직 갈 길이 남았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어요. 요즘에는 곡을 써보려고 해요. 내가 만든 음악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순간이 얼마나 좋은지도 아니까요.
☑ 「꽃병 속 꽃은 뿌리가 없다」는 전복들의 음악적 이미지와 어울리는 곡 같아요. 무거운 이야기를 친숙한 멜로디로 표현하고 있어요.
여운이 남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려면 감정을 더 촘촘하게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멤버들과 잘 협의하는 게 중요해요. 모두가 곡을 이해하고 있어야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죠. 멤버마다 이 곡의 해석이 달랐어요. 오랜 시간 논의해야 했죠. 사실 이 곡을 타이틀로 삼으려던 건 아니에요. 프로듀서와 작업을 마치고 보니 앨범의 방향과 딱 어울리는 곡이 되었죠.
처음에는 펑크 버전이었어요. 싱글이었다면 펑크 버전으로 냈을 거 같아요. 우리에게 펑크를 기대하는 리스너도 분명 있고요. 앨범 단위의 작업을 할 때는 고려할 게 많아요. 전체 흐름을 생각해야 하죠. 「투명인간」과 「이 밤은 널 좋아하니」 사이에 배치된 곡인데 갑자기 펑크한 사운드가 흐르면 앨범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앨범의 서사를 자연스럽게 잇고 싶었죠.
☑ 「이 밤은 널 좋아하니」는 신나는 리듬이 돋보이는 곡이에요. “저 달이 몰락하는 날 너와 둘이 걷고 싶어” 노래하는 부분이 무언가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거 같았어요.
이 곡의 리듬을 구성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디스코 리듬의 곡으로 완성했지만, 이전 버전은 편안한 리듬의 곡이었어요. 멤버들의 해석을 곡에 녹여내고 싶었어요. 모두의 상상력을 담아 함께 만들고 싶었죠. 멤버들에게 의견을 제안할 때 느슨하게 말하곤 해요. 하나의 곡을 두고 치열하게 논의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저마다의 해석으로 아옹다옹하며 서로를 설득하는 순간이 밴드 음악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음악이 재밌어져요. 느리고 힘들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에요. 마침내 합의에 이른 음악이 세상에 나올 때 희열을 느껴요.
☑ 앨범 소개에 ‘기성세대’라는 말이 있어요. 전복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이십 대를 돌아보면 기성세대에 관한 막연한 반감이 있었어요. 앞선 사람들은 저렇게밖에 할 수 없을까? 질문하곤 했죠. 어느새 저도 사십 대를 향하고 있어요. 이 사회에서 사십 대의 역할은 뭘까? 고민하고 있어요. 기성세대는 듣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부모는 아이에게 옳다 그르다 하며 답을 내리는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안을 제안할 수는 있지만 결정은 오롯이 아이의 몫이에요.
우리의 음악이 모든 세대를 이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단지 여러 세대의 이야기를 우리의 시선에서 노래할 뿐이죠. 그게 전복들의 역할이고요.
살아가는 모양을 보여주는 거죠.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고요.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서슴없이 가까운 목욕탕으로 간다.
아무것도 챙기는 것도 없고,
사는 것도 없다.
그냥 가는 것이다.
이원정, 「원정이는 깔끔해」 라이너노트: 목욕을 하면 기분이 좋다
「오리진 오브 전복들 트릴로지」는 전복들이 2018년 발표한 「우주가 전복해」를 다시 부르는 프로젝트다. 전복들의 과거와 현재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원정이는 깔끔해」는 그 가운데 두 번째 발표곡이다. 이 곡을 다시 부르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었다고 했다.
「원정이는 깔끔해」는 전복들의 어제이자 오늘이며 내일이에요.
고창일은 즐기면서 연주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즐거움이 관객에게 전달된다고 믿는다며 틀리면 틀린 대로 좋다고 했다. 연주자로서 느끼는 만족감이 더 중요한가, 관객에게 전해지는 즐거움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는 정답이 없다고 답하며 정해진 규칙 같은 건 없다고 덧붙였다.
무대의 에너지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오곤 해요.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서 음악을 하고 있어요. 몇몇 멤버는 직장을 다니고 있고요. 전업 음악가와 비교하면 연습 시간이 부족한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음악을 즐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정하고 친절한 동네 밴드라는 철학은 여기에 맞닿아 있어요. 음악 하는 즐거움으로 연습하고 노력하면 훨씬 더 행복하게 활동할 수 있죠. 젊고 음악 욕심이 많은 경래씨는 생각이 다를 수 있어요. 생각이 다르다는 건 나쁜 게 아니에요. 각자 다른 매력이 한곳에 모이는 것 자체가 밴드 음악의 힘이니까요.
☑ 「원정이는 깔끔해」 악기 녹음을 경북음악창작소(054 soundville)에서 했다고 들었어요.
경주에 있는 경북음악창작소에서 녹음 지원 사업을 했어요. 이전에 녹음했던 공간보다 넓은 곳에서 작업할 수 있었어요. 음원에 공간감을 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앰프마다 다른 방에서 최대 출력으로 소리를 높이고 녹음할 수 있다는 점도 이곳에서 작업한 이유 중 하나예요.
보컬 녹음은 전복들 연습실에서 했어요. 편안한 공간과 환경에서 작업했죠. 이 점은 프로듀싱을 맡은 단편선과 믹싱 등에 도움을 준 장미님의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해요. 녹음을 위해 대구까지 흔쾌히 와줬으니까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세심한 계획과 배려가 작업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다시금 알게 되었죠.
☑ 악기 녹음을 원테이크로 했어요. 이런 작업 방식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원테이크 녹음은 「할머니 소파」 때부터 해보고 싶었어요. 그때는 준비가 부족했어요. 라이브로 연주할 때의 분위기를 담고 싶었거든요.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원테이크로 녹음한 음원을 낸다는 건 다른 차원의 도전이에요. 「원정이는 깔끔해」를 라이브 레코딩으로 작업하며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고 싶었어요. 신중하게 디테일을 가다듬는 과정을 거쳐야 했죠. 다들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 덕분에 곡이 더 풍성해졌고요.
☑ 이 곡은 전복들이 어떤 음악을 해왔고 어디로 나아갈지 엿볼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해요.
전복들은 쉽고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음악을 해요. 어떤 음악을 하기 위해 그 음악과 닮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쉽고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게 먼저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관계를 넓히는 것도 중요해요. 다양한 사람들과 협업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어요.
김경래는 조명이 집중되는 순간이 짜릿하다고 했다. 그런 작은 순간이 모여 음악을 하는 동력이 된다고 했다. 박은아는 학교에서 밴드 동아리 학생들을 지도하며 음악가로서의 꿈을 발견했다. 고창일은 딸이 공연장에 왔던 날의 이야기를 했다.
한동안 공연장에 오지 않던 딸이 부산에서 공연할 때 왔어요. 공연이 끝나고 딸이 말하더라고요. 아빠 공연은 1150점이래요. 100점도 아니고 300점도 아니고 1150점이요. 제 딸이 우리 음악을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까 우리 음악을 듣고 있었고 관심 없는 척했던 거예요. 음악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이에요. 아이들에게 아빠 멋있다는 말을 듣는 게 너무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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