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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는 중이네. 뭔데, 재밌어?
=왔어? 여기 앉아. 재밌어. 재미란 말로는 다하지 못할 정도지.
-평소 뭘 가져다줘도 깐깐하게 굴더니 웬일이야. 어떤 책인데?
=마법의 과일 같은 책이야.
-마법의 수프는 들어봤는데. 먹으면 힘이 난다든가, 비현실적으로 달콤해서 그런 거야?
=달콤한 맛은 약하고, 신산辛酸한 맛이랑 삽미澁味가 세. 거기다가 무거워서 혀에 오래 남아. 과일치고 어울리지 않는 밸런스지. 근데 알잖아. 나 이런 쪽 취향인 거. 신맛 없이 달콤하기만 한 건 처음에나 좋지 두고두고 먹기에는 별로야. 한번 먹고 나면 지겨워.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까맣게 잊든가, 나머지를 박스째 헐값으로 처분하기 일쑤야.
이건 그저 그런 과일이랑은 차원이 달라. 짜내도 짜내도 신선한 과즙이 끝없이 흘러나와. 한 번에 욕심껏 너무 많이 짜내버리면 맛이 심심해지거나 잘 안 나오기도 해. 근데 이게, 얼마 동안 잊고 지내다가 다시 열어보면, 다시 과즙이 가득 들어차 있거든.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그러면 나는 또 거기에 코를 처박고 정신없이, 갈증이 가실만큼 충분한 양을 빨아먹는 거야.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돼?
=음. 포만감에 취해서 현실로 다시 돌아오지. 스스로 뿌듯할 만큼 단단해져. 바깥에서 좀 힘든 일이 있어도, 뱃심으로 튕겨낼 수 있어. 조금 오버하자면 무인도든 군대든 이걸 들고 가면 1년은 더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그렇다고 주인공처럼 남쪽에 있다가, 북쪽으로 갔다가, 전쟁터까지 끌려가는 데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군대에 갖고 들어갈 책이라니 엄청난데. 나도 네가 말하는 그 맛을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글쎄. 그건 모르지. 이거 껍질이 단단하거든. 안쪽에 몰린 과즙을 맛보려면 조금 애를 써야 할 거야. 그리고 설령 네가 그 맛을 본다고 해도, 그게 내가 느끼는 맛이랑 같은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단 말이지. 사람의 입맛은 저마다 다 다르니까. 안 그래?
-응. 제목만 봐서는 무지 텁텁한 맛일 것 같아. 으으, 또 표지는 왜 이렇게 삐죽삐죽 우중충해. 요새 나오는 책들이 얼마나 보드랍고 산뜻한데.
=하하하. 그러고 보니 이 책, 두리안 같다.
-두리안? 아, 그 냄새나는 거? 아직 먹어본 적 없는데. 맛있어?
=뭔 소리야. 두리안은 과일의 왕이야.
-응. 알지. 그래도 생긴 게 영 기분 나쁘지 않아?
=생긴 걸로 맛을 평가하다니 아쉽네. 왜, 마트에 가면 실속 없는 과일인데 판매 목적으로 가공돼서 때깔만 번드르르한 경우도 있잖아. 나는 지금까지 그런 것에 너무 많이 속았어. 돈도 돈이지만 기껏 사온 게 아까워서 몇 개나 꾸역꾸역 먹어치우는 일이 싫어. 웬만하면 마트표 말고 과일 가게에 가서 직접 맛을 보고 입맛에 맞는 걸 사려고 해. 거죽에 흠이 있더라도 속이 맛있으면 오히려 나는 기쁠 거야.
책도 마찬가지야. 세상에 책은 너무 많은데 내 방의 책장은 좁고, 인생은 짧아. 나는 오랫동안 단종되지 않고 내려오는 고품질들로만 골라서 읽고, 그중에 입맛에 딱 맞는 걸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 읽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지금 들고 있는 책 같은 거?
=이 책 정도라면 조금 과장해서 100번이라도 괜찮아. 우선 문체가 지적이고 세련되거든. 분단이나 이데올로기 이야기도 흥미로워. 하지만 그걸 다 빼놓고도 읽어낼 게 무척이나 많아. 꿈과 희망, 개인과 사회의 관계, 삶의 짐작 이야기, 사람됨의 의미, 그 중에서도 가장 값진 걸 하나만 뽑으라면...그래 사랑.
아까부터 내용 없이 말하려니 대화가 겉도네. 너랑 나랑 친구지? 나 믿지? 이참에 두리안 먹는 셈 치고 이거 한 번 읽어 봐. 네 취향에도 맞을지 궁금해. 완전히 아니다 싶으면 다른 책을 찾아보지 뭐.
-그럴까. 여기서 앞부분이라도 읽을래. 아, 나도 음료를 주문해야지. 깜빡했다.
=같은 걸 읽는다니 기분이 좋아지네. 아이스 바닐라 라떼 어때? 내가 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