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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Nov 04. 2021

스타벅스 2층 창가자리

덧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로 항해할 것인가

사진 출처: www.pixabay.com



 

  예년에는 달에 한번쯤은 용무가 없이도 번화가에 나가곤 했다. 백화점에서 남성복 매장을 쭉 둘러보고는 점심을 사먹고, 사람이 지나다니는 거리를 한동안 걸어다닌다.


  주말이면 온통 사람이 쏟아져나오고 거리는 혼잡하다. 그들을 제치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하면서 적당히 피곤해질 때까지 걷고 걷는다. 집에 가는 차를 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이 스타벅스다.


  스타벅스의 충성 고객은 아니다. 커피 맛에 둔한지라 다른 브랜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입지가 좋다. 목 좋은 곳에서 두세 층을 한꺼번에 쓰고 통유리를 깨끗하게 닦아놓는다. 바로 그 통유리로 번화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자리에 가기 위해 스타벅스를 찾는다.

  시럽과 파우더가 많이 들어간 음료는 싫다. 먹고 나서 속이 더부룩하고 혀에 감질이 남는 게 질색이다. 오더를 넣고는 진열장에 전시된 텀블러며 머그컵을 살핀다.


  올 때마다 매번 디자인이 바뀌어 있다. 종류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텀블러를 1,000번 이상은 써야 환경 보호 효과가 있다고 했던가. 그나마 무늬와 색상이 단순한 게 질리지 않아서 오래 쓰기 좋다. 내가 4년째 쓰고 있는 텀블러가 생각난다. 그러고보니 스타벅스에서 산 물건이군. 메이드 인 차이나지만 퀄리티는 비싼 가격만큼 괜찮다.

까마귀소년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쟁반에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담긴 머그잔을 얹어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른다. 가파른 계단에서 음료를 엎지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내 시선은 위를 향한다. 창가자리가 하나쯤은 비어 있기를. 두 개가 비어있으면 좋지만, 하나라도 괜찮다.


  창가자리가 있으면 얼른 가서 쟁반을 내려놓고 뒤로 돈다. 노블레스, 럭셔리 같은 잡지를 꽂아놓은 서가가 보인다. 여태 나 빼고는 그런 걸 는 사람을 통 못 보았다. 최신호로 두 권을 옆구리에 끼고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창가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휘 둘러본다.

  보통 창가자리 사람은 일행이 없는 편이다. 그리고 음료 쟁반 옆에 책, 필기도구와 함께 노트북을 놓고 뭔가를 보는 데 열중하고 있다. 요샌 어떤 걸 공부하든 종이책만을 갖고 하긴 어렵나보다. 나는 도서관에서 그날의 공부량을 소화하고 난 뒤 인강은 집에 돌아와서 듣는 편이었다. 외부로 기기를 갖고 나온 적이 없었기에 어디를 가든 스마트기기를 들고 다니는 습관이 과연 효율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온갖 SNS, 유튜브의 자극적인 피드와 쉴 새 없는 알림의 유혹을 뿌리치고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놀이와 공부를 수시로 오가면서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일까?


  자리에 앉아 왼손으로 머그를 잡고 홀짝이며 오른손으로는 잡지를 편다. 기사에는 통 관심이 없다. 패션 잡지의 기사는 일반적인 뉴스 기사와 달리 재미가 없다. 뉴스 기사는 왜곡과 은폐가 있더라도 적어도 새롭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반면에 패션 잡지의 기사란 본질적으로 광고다. 글쓴이가 발로 뛰며 취재를 했든 방구석에서 노트북만으로 쓴 글이든 간에 전부 '무언가를 사라'라는 노골적인 저의가 느껴진다. 그래서 인위적이고 영양가가 없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매달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노고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어디서든 마주치는 광고인데 굳이 글의 형태로까지 보면서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을 뿐이다.

  명품 브랜드의 최신 화보를 보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공들여 찍은 사진은 시각 자체로 충분히 즐겁다. 그리고 제품을 통해 나는 상류층의 생활 양식이 무엇인가를 관찰한다.


  패션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상류층을 흉내내기만 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광고를 실감 나게 전달하기 위해 맛보기와 체험을 할 뿐이다. 하지만 브랜드는 다르다. 명품 브랜드 회사는 상류층의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물건을 직접 생산하고 판매한다.


  잡지를 통틀어 그들이 광고하는 분야를 살핀다. 요트, 비행기, 자동차, 풀빌라, 미식, 술, 섹스, 고급 가구, 보석, 모피, 가방, 구두, 시계, 팔찌, 선글라스 따위가 현란하게 때론 절제된 무드로 표현되어 있다. 어떤 회사는 물건이 아니라 경험을 팔기도 한다. 그런 생활 양식을 좇아가려면 갖추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갖추기 어렵다. 일일 체험이라도 불가능하다.

  향락, 영리, 환상으로 도배된 잡지를 덮고 한쪽으로 밀친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들자 걸어가는 사람들이 다시 보인다. 내가 빤히 쳐다보아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 역으로 유리 속의 날 흘끔 쳐다보고 가지만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소리도 눈짓도 유리를 통과하지만 결코 통하지 않는다. 카페 안의 사람들과도 한 공간에 함께 있지만 서로 조금도 간섭하지 않는다. 참으로 평화로운 단절이다. 이것이야말로 도시인의 여가가 아닌가.

  이제 됐다 싶을 만큼 유리 밖을 관찰하고 거리를 재고 비춰본다. 커피를 다 마셨다. 오 일간 좁혀졌던 세상과 나의 거리가 적당한 규격을 찾으며 미세하게 조정된 느낌이 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빈 머그잔을 쟁반에 담는다. 잡지를 서가에 꽂아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쟁반을 정리대에 가져다 놓는다. 계단을 내려오니 카페는 1층, 2층 할 것 없이 여전히 붐비고 있다. 점원들은 끊임 없이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고 음료를 만드느라 분주하다.

  주말 오후가 저물어간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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