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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Nov 05. 2021

총량 보존의 법칙

가짓수를 더 줄이고 질은 높여나가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진 출처: pixabay




 쇼핑에서 돌아와 새 옷들로 옷장을 채우는 일은 기대와 함께 근심을 낳는다.


 태그를 떼 버리고 옷걸이에 거는 동안, 조만간 새것을 입고 집 밖을 나설 것을 생각한다. 설렌다. 옷장 문을 열어 새것을 집어넣자, 원래 걸려 있던 것들이 한켠으로 밀려난다. 마음이 무겁다. 옷장에서 밀려남은 내 관심에서 그만큼 밀려남과 다르지 않다.  out of sight, out of mind.


 취업을 막 했을 땐 무엇이든 단출했다. 출근을 위해 급히 마련한 정장 두 벌과 셔츠 몇 점, 넥타이 몇 점. 학생 때부터 쓰던 석 자짜리 옷장 하나로 족했다. 속옷과 양말을 넣는 서랍 한 칸, 셔츠와 바지를 넣는 서랍  한 칸, 정장과 외투를 거는 공간 한 칸. 이 얼마나 심플한가? 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오늘의 패션(Outfit Of The Day) 같은 건 없다. 어제 입은 옷을 오늘도 입고 있었으니까.


 직장에서 첫 해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복장에 대해 상사가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둘째 해부터는 갑자기 느슨해졌다. 매일 비슷한 차림을 하는 것이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다. 점차  캐주얼 복장에 눈을 돌려 기초적인 품목들을 사들였다. 폴로와 같은 전통적인 캐주얼 브랜드에서는 아우터를, 저렴한 spa  브랜드에서는 옥스퍼드 셔츠나 울 스웨터, 치노 팬츠를 선택했다.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 수트에 버금가는 격식을 갖춘 차림도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도 캐주얼이다. 아무리 쿨비즈란 그럴듯한 구호가 있어도 나란 인간이 비루하게 보이지 않아야 하고 직장이란 TPO를 고려해야 한다.  재킷과 긴팔 셔츠 정도면 나머지가 다소  튀어도 선을 넘지 않겠다 싶어 두 가지를 코디의 중심으로 했다. 비즈니스 캐주얼은 출근복과 일상복으로 통용된다는 점에서 수트 차림보다 유용했다.   


 계절마다 눈에 들어오는  옷을 하나둘씩 모으다 보니, 옷장으로는 모자라 방의 한쪽 면을 가득 채우는 2단 행거를 들였다. 위아래 단을 모두 빽빽하게 채우는 데는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에 출근하는 5일 동안 매일 다른 복장을 하면서도 주말에 입을 옷들은 따로 있었다. 전셋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미관을 해치는 행거를 버리려고 했지만, 붙박이장만으로는 내 옷을 다 보관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때쯤 슬슬 깨닫게 된 건 내가 일주일, 그리고 한 계절 동안에 입는 옷가지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일주일에 입을 총량을 벗어난 시점부터는 우선순위에 따라 입지 않는 옷이 생겨난다. 쇼핑백에서 꺼내 포장지를 벗기고 태그를 떼면서 설렜던 옷들이다. 어떤 건 오래 입을 요량으로 아껴 입어서 별로 낡지도 않았다. 어찌 됐든 새로 들어온 것에 밀려났다. 점점 옷장 구석으로 몰리고 다른 옷가지 사이에 파묻혀 끝내는 잊힌다.


 클래식 패션에 입문하면서 본격적으로 워드로브를 정비할 필요성을 느꼈다. 옷장 문을 열지 않고서도 내가 좋아하는 옷들이 어디에 있는지 훤히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옷가지 총량 보존을 위한 원칙'을 마련했다.


1. 아우터/셔츠/니트/팬츠/신발 이 다섯 가지의 항목에 들어가는 옷들의 목록을 작성한다.


2. 항목별로  총량을 정하고 총량을 초과할 경우 우선순위가 낮은 것부터 과감히 처분한다.


3. 다음 계절이 시작되기 전에 한 차례씩 입어보면서 남길지 처분할지를 결정한다.


 이에 따라 옷장을 1/4분기 별로 한 번씩 점검하여 포화 상태가 되지 않는 선을 유지하고 있다. 총량제라고 해 봤자 일주일에 같은 옷을 2번 이상 입지 않으려는 고집은 남아 있어서, 항목별 수가 적지 않다. 아우터만 10점에 셔츠 10점, 팬츠 15점, 니트 15점, 신발 6켤레가 나의 상한선이다. 항목에는 없지만 셋업 수트 2벌, 수트 2벌, 넥타이와 벨트 여러 점, 티셔츠와 운동복 몇 벌까지 포함하면 포화까지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복식의 초점을 클래식 컨템퍼러리에 두면서, 가짓수를 더 줄이고 질은 높여나가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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