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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Nov 10. 2021

겨울 멋쟁이와 양들의 침묵

겨울에는 코트가 우아함을 드러내기에 제격이다

사진 출처: www.pixabay.com




  입동을 지냈으니 절기 상 겨울에 접어들었다. 내가 사는 지역은 남쪽이어서 한겨울에도 그다지 심한 추위는 오지 않는다. 바람이 세지 않은 날은 코트에 머플러 차림만으로도 바깥나들이를 한다.


  롱 패딩이 유행을 타는 지난 5년 동안에도 거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 딱 한번, 이불로 대신해도 될 만큼 오리털을 쑤셔 넣은 대장급이라는 걸 비싼 값에 샀다. 모델핏으로 유명한 연예인이 CF에 출연한 효과로, 당시 초도 물량이 모자라서 중고거래 사이트에 웃돈을 얹은 매물이 나돌았다.


  어쩌다 보니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물건을 구했지만 막상 입으려고 하니 입을 만한 날이 없었다. 두어 달을 옷걸이에 모셔놓고 관상용으로 쓰다가 결국 중고거래로 처분한 게 마지막이다.


  겨울은 아우터가 전체적인 인상을 좌우하는 계절이다. 유형을 나누자면 참으로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다운 점퍼, 코트, 무톤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은 다운이 들어간 점퍼를 선호한다. 셋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가장 저렴하며 가장 관리가 용이하다. 코트나 무톤을 일부러 찾아 입는 사람들은 맵시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선호도는 코트-다운 점퍼-무톤 순이다. 가장 불호인 무톤(모피)은 입어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입을 생각이 없다. 무톤이 옷감으로 쓸 수 있는 최고급 소재임은 안다. 모델이 무톤 재킷을 걸친 화보를 보고 멋지다고 생각해 본 바도 있다.

  

  다만 남극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멋을 부리기 위해 짐승의 가죽을 덮고 다닌다는 발상을 좋게 볼 수가 없다.


  무톤을 생각하다보면 <양들의 침묵>이 자동으로 연상된다. 살인마 버펄로 빌은 사람의 가죽을 벗겨 옷을 해 입는다. 인피를 탈취당하는 여자들은 비명을 질러 댄다. 수사관 클라리스의 기억 속에서 양들은 도살장에 끌려 가 껍질이 벗겨진다. 모피를 탈취당하는 양들은 비명을 질러 댄다.


  영화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내 관점으론 두 가지 상황이 어쩐지 비슷하게 맞아떨어져, 모피를 걸친 사람과 인피로 옷을 해 입은 버펄로 빌이 겹쳐 보이게 되었다.


  점퍼에 가득 채워 넣은 오리 가슴털과 모자에 달린 너구리 털은 무톤보다 죄책감을 조금 덜어주지만 여전히 마음을 아프게 한다. 생산성을 위해 오리를 우리에 가두어 기르면서 산 채로 털을 뽑아내고, 자라나면 다시 뽑아낸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다행히 살아있는 동물의 털을 뽑는 라이브 플러킹(live plucking)을 하지 않고 윤리적인 방법으로 털을 채취하여 만든 다운 제품이라는, 이른바 RDS 마크가 보이기 시작한다. 옷을 고를 때 그걸 보고 구입하긴 하지만 반대로 그 마크가 붙어 있지 않은 다운 제품들은 생산 단가가 비교적 저렴할 테고, 마크가 붙어 있지 않은 다운 점퍼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이 양산되고 있을지를 생각한다.


  요샌 다운을 넣은 조끼나 경량 패딩도 흔해 빠졌다. 어느 정도 난방이 되는 실내에서 겉옷을 벗어놓고 이너 위에 조끼를 걸쳤을 때 활동하기에 편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다운 조끼가 심미성과 윤리성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예쁘지도 않고 마음이 편하지도 않다. 경량 패딩은 예전만큼 자주 보이지 않는 게 플리스가 유행을 타면서부터다. 비슷한 포지션인 경량 패딩의 자리를 밀어내고 있는 모양샌데, 화학 섬유로 만드는 플리스를 널리 입는 게 그나마 낫다.


  양이나 산양, 알파카, 낙타의 털은 소비로 인한 죄책감이 가장 덜한 소재다. 그리고 심미성과 실용성을 모두 충족해준다. 코트뿐만 아니라 수트, 니트웨어, 팬츠 등 대부분의 옷가지는 양모로 만든 것으로 골라 갖추었다.


  합성 섬유도 천연 섬유 못지않게 착용감이나 기능 면에서 발전했다고는 해도, 어쩐지 정이 가지 않는다. 옷을 고를 때 아무리 유명한 모델이 멋지게 소화한 옷이라 해도 아크릴 레이온 나일론이 많이 섞인 경우 바로 탈락이다.


  내가 좋아하는 컨템퍼러리 브랜드의 옷들도 합성 섬유의 비중이 아주 큰 편이다. 아무래도 천연 섬유를 높은 수준으로 가공하는 비용보다 합성 섬유를 가공하는 비용이 적게 드는 때문이라 추측한다.


  아무튼 겨울은 아우터고, 아우터 중에서는 코트가 우아함을 드러내기에 제격이다. 코트의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지만 난 서로 다른 스타일의 코트를 딱 네 점만 마련하고 싶다.


  현재 세 점의 코트를 갖추고 있긴 한데, 전부 5~6년 전쯤 컨템퍼러리 브랜드에서 구입한 것들이다. 1. 카멜 체스터 코트 2. 네이비 체스터 코트 3. 글렌체크 체스터 코트.


  색상과 무늬를 다르게 했지만, 전부 싱글 브레스티드라는 점이 아쉽다. 유행과 내구성을 충분히 고려한 것들이므로 아직 5년 정돈 입을 만하다.


  나는 저것들을 처분하고 새로운 코트로 옷장을 채울 5년 후를 상상한다. 색상과 무늬뿐만 아니라 코트의 형태도 서로 다른 것을 찾고 있다. 각각의 예산은 1년에 하나만 산다는 가정 아래, 100만 원에서 최대 250만 원이다.


  올 겨울엔 추가 구입과 방출 없이 총알을 비축하며 보내려고 한다. 내년에 또 눈이 얼마나 높아져있을지 모르니 총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1. 다크네이비 체스터 코트

2. 카멜 폴로 코트

3. 그레이 헤링본 발마칸 코트

4. 브라운 발마칸 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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