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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Nov 12. 2021

취향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는가

어린이집가방에서부터 브리프케이스까지

사진 출처: www.instagram.com/stdupont_korea




  인생의 첫 번째 가방은 뭐였을까. 어린이집을 다닐 때 메고 다닌 게 첫째였음이 틀림없다. 그땐 취향이라는 게 없었다. 가방이 어떤 모양이든 내 소유란 것만으로도 기뻤다. 어른들이 하나씩 들고 다니는 걸 쳐다보다가 직접 등에 맨다는 자체로도 뿌듯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호불호의 기억은 없다. 아마도 좋아했을 거란 짐작뿐이다.


  딸에게서 어릴 적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이는 어린이집 이름이 크게 박혀 있고 이름표가 없으면 누구 것인지도 모를, 그저 그런 디자인의 가방에도 제법 애착을 느낀다. 가끔 어린이집 하원 시간과 퇴근 시간이 맞아떨어져 아이를 데리러 나갈 때가 있다. 어린이집 차가 멈추는 아파트 후문부터 집까지 약간의 거리가 있는데, 가방을 내가 대신 들어줄라치면 자신이 고 집까지 가겠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식판과 수저통, 물통, 수첩, 여벌 옷 등으로 제법 무게가 있는데 씩씩하게 잘 걷는다.


  뿌옇게 흐린 머리로 그 뒤를 상기해보면, 나이를 먹고 학교에 가면서 몇 번의 가방을 바꾸는 동안 나름의 취향이란 게 싹텄다. 다만 취향을 충분히 테스트해 볼 만한 자금이 부족했고 더 근본적으로는 패션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제일 안전한 길은 친구 따라 가방 사러 가는 것이었다.


  이제 또렷이 기억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예나 지금이나 가방에 별 관심 없는 고딩은 나이키나 아디다스에서 나온 검은색 백팩을 메고 다닌다. 싸고 튼튼하다. 그러나 당시 루카스니 키플링이니 1942miles니 하는 가방 전문 브랜드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였고, 특히 집안 형편이 좋을 것 같은 친구들은 어김없이 그런 브랜드 가방을 쓰곤 했다.


  원숭이 피규어가 달린 키플링 백팩의 가격은 나이키족히 2~3배였다. 책이나 참고서를 사는 데는 돈을 아낌없이 지원해주셨던 어머니도 가방이나 신발 따위에 10만 원 이상 지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설에 받은 세뱃돈과 한 달 여 간 간식을 포기하고 모은 돈을 합쳐 가방 하나를 간신히 구입했다.


  돌아보면 가방 하나 때문에 그런 궁상을 떨었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애초에 그것들은 내 본연의 취향이라기보다는 친구들의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신발이든 가방이든 유명 브랜드 제품으로 하나씩 갖추고 나서는 친구들과 유행을 공유했다는 안도감과 소속감 때문인지 더 이상 물욕이 생기질 않았다.


  그로부터 십 수년이 흐르고, 재작년 생일에 사진의 사각형 브리프케이스를 새로 장만했다. 저 가방을 사기까지에는 대략 2개월쯤 소요되었다. 품절이 되어 재입고를 기다리거나 턱없이 비싼 가격 때문에 돈을 모으느라 지체된 게 아니다. 가방에 대한 취향을 마련하는 데 걸린 시간이 그만큼 길었다.


  직장인들 중에서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열에 하나가 안 될 것이다. 수납공간으로 보나 무게로 보나 실용성 면에서 백팩에 상대가 안 된다. 내게는 6년 정도 잘 고 다니던 백팩이 있었고, 어느 정도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 몇 년은 더 쓸 만했다.


  그러나 클래식 패션을 설파하는 책을 사서 읽던 도중, 정돈된 클래식 복식에 백팩을 메는 건 난센스라는 내용을 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 복장에 격식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추가한 뒤로 우아한 브리프케이스를 꼭 장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손잡이가 있는 사각 가방이라고 해도 너무 범위가 넓다. 어떤 걸 사야 할지 알려면 비교의 대상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시중에 나온 모든 잡화 브랜드의 가죽 가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일정한 퀄리티가 보장되어야 하기에 보세는 제외하고 백화점에 입점한 브랜드 위주로 살폈다. 가장 중요한 가격, 브랜드의 유명세, 마감, 희소성, 내구성, 심미성 등 하나부터 열까지 작지만 분명한 업체와 제품 간의 차이가 있었다.


  주말마다 백화점을 방문해 국내 브랜드부터 럭셔리 제품을 취급하는 해외 브랜드까지 순회하며 만져보고 들어 올리는 동안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 갔다.


1. 가격은 100에서 200 사이: 이보다 싸면 질이 의심스럽고, 더 비싸면 가격이 부담스럽다.

2. 서류 가방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 아무래도 한 길을 파는 회사 제품의 질이 좋을 거라 믿는다.

3. 지퍼 대신 자석으로 여닫는 방식: 지퍼는 경험 상 오래 쓰면 고장이 나거나 마모된다.

4. 실밥 하나 없는 마감 처리: 전체적 실루엣이 매끈해야 한다.

5. 브랜드 로고가 대문짝만 하게 박히않은 것: 브랜드가 먼저 보이는 가방은 싫다.

6. 겉면이 쉽게 긁히지 않도록 가공된 것: 오래오래 쓰고 싶다.

7. 손잡이와 가방을 잇는 부품이 금속 재질일 것: 왠지 그쪽이 멋있으니까.

8. 어깨 끈이 없는 것: 서류가방을 크로스로 메지 않을 것이다. 귀찮아도 손으로 들겠다.

...


  숙고 후에 어렵게 결정을 내렸고 S.T. 듀퐁이라는 프랑스 회사의 가방을 들였다. 2개월의 숙고가 무색하지 않게 지난 2년 간 후회 없이 들고 있다. 이목을 끌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멀리서 봐도 만듦새가 좋다. 클래식한 복장과 조화를 이루는 정중함과 우아함이 있다. 내구성도 매우 뛰어나서 가방이 해지기 전에 먼저 내가 질릴 정도다.


전통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신사의 가방으로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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