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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Nov 16. 2021

서류가방 속 철학

가방을 든 내 모습이 허세가 아닌 품위로 보이기를 원한다

사진 출처: 까마귀소년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가 미덕이고 정체성이며 숙명이다.


  옷장이며 신발장, 서랍장을 꽉꽉 채우는 수백 가지 물건들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놓여 있지 않았다. 고작 한 사람의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백화점에서, 마트에서, 온라인 쇼핑몰에서 끊임 없이 사들이고 사들이고 또 사들인 결과물이다.


  소비의 굴레를 쓰고 있다보니 생활에 필요한 수준의 수량은 오래 전에 돌파했고 집안의 수납 공간은 갈수록 협소해진다. 안 입는 옷가지와 안 신는 신발이 사계절 내내 먼지를 뒤집어쓰는 동안에도 반성을 모르는 소비자는 월급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생활비를 이체하고 남은 용돈으로 또 무엇을 살까를 몇 날이고 고심한다.


  이 지연된 구입을 합리적 소비라고 스스로 위로해 왔으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싼 것을 자주 사나 비싼 것을 가끔 사나의 차이 정도다. 굴레에 달린 고삐를 온전히 컨트롤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지난 글의 연장이다. 손품 발품을 팔면서 벼르던 끝에 가방을 장만했다. 그나마 가방은 옷과 달리 한 개만으로도 욕심이 충족됐다. 가방이 다 해지기 전까지 다른 걸 추가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다. 식탁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안에 들어 있던 걸 다 꺼내보았다. 목록에서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고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들고 있던 핸드폰뿐이다.


1. 블로그용 블루투스 키보드 1개

2. 체크카드 1장

3. 화장품류 3개 (기름종이, 입술보습제, 자외선 차단제)

4. 필기도구 1자루

5. 열쇠 꾸러미 1개 (자동차키, 아파트 현관키, 책상 서랍 열쇠, USB)

6. 선글라스 1개

7. 무선 이어폰 1세트


다음은 가방에 들고다닐 법한 물건 중에서 소지하지 않은 것들이다.


1. 지갑 일체(카드, 현금, 신분증, 명함): 핸드폰에 내장된 카드 결제 및 현금 인출 기능 덕분에 지갑은 집에 두고 다닌다. 요샌 신분증조차 내보일 일이 드물다.

2. 향수: 향수에 대해 뭣도 모르면서 니치 향수를 사서 쓰다가 반도 쓰지 않고 사무실에 보관 중이다.

3. 손수건: 신사의 물건으로서 어울리긴 하는데 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다.

4. 만년필: 비싼 필기구에 대한 로망이 없다.

5. 우산: 길고 거추장스러운 우산은 늘 자동차 트렁크에 보관한다.

6. 키링: 자동차키가 무엇보다도 확실한 키링 역할을 해 준다. 그 이상은 열쇠 꾸러미의 무게와 부피를 늘리기만 할 뿐이다.

7. 장갑: 장갑을 낄 만큼 외부 활동을 할 날이 드물어, 겨울철 출퇴근 시에만 낀다. 자동차 콘솔박스에 보관 중이다.


  사실 남자에게 가방이 필수품인가 싶기도 하다.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소지품을 자동차와 사무실에 적절히 분산해서 갖다놓으면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다. 겨울철에는 롱패딩에 달린 깊숙한 주머니가 있다. 손뿐만 아니라 어떤 물건이든 끝도 없이 들어간다.


  가방이 꼭 필요한 경우라 해도, 실용성 측면에서 나일론으로 만든 백팩을 따라갈 수가 없다. 내 가방의 값은 웬만한 백팩의 10배는 된다. 그러나 백팩에 비해 10배 실용적이기는 커녕 그 반대다. 가방의 오염이 걱정돼서 텀블러나 음식물은 넣을 수가 없고, 노트북과 두꺼운 소설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만큼 내부 공간이 협소하다. 어깨끈이 없으니 꿋꿋이 손으로 들고 다녀야만 한다. 좋게 보더라도 허세와 품위 사이의 어떤 지점에 위치해 있다.


  가방을 든 내 모습이 허세가 아닌 품위로 보이기를 원한다. 그저 돈으로 신사의 껍데기만 흉내낸 데 그치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러려면 서류가방 속에 알맹이, 즉 철학을 반드시 채워넣고 다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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