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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Nov 14. 2021

꽃망울 하나

프롤로그

사진 출처: www.pixabay.com



  

  고른 숨소리를 내며 내 옆에 잠들어 있는 이 꽃망울이야말로 남은 인생의 출발점이요, 지향점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게 수십 억의 인간들이 질긴 명을 꿋꿋이 살아내야 할 이유라면, 나도 그 의미를 한 가지는 경험으로 확실히 알겠다.


사람과 교류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가끔 보아야 좋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주 보고 싶고 부대낄수록 더 좋은 사람이 있다. 전자는 직장동료와 친구, 그리고 부모형제다. 직장동료나 친구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부모님과 내가 타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제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느껴진다.


  분명 그분들의 정기를 받아 세상에 태어났음에도, 그리고 수십 년간 자애로써 나를 길러내 준 공이 있음에도, 그들과 내가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은 극도로 희박해진 지 오래다. 독립한 이후로 들르는 부모님의 집은 엄연히 타인의 집이고 타인의 집에서는 내 집처럼 편하게 있을 수가 없다.


  후자는 아내와 아이다. 서로 다른 집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끼리 만나 우리는 사랑에 빠졌고, 가정을 이뤘고, 새로운 사람을 이 세상에 나게 했다.


  처음엔 둘이서 그리고 지금은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유대라는 벽돌을 쌓아올리고 있으며 그리하여 만들어진 벽돌집은 다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이 튼튼하다.


  당장의 걱정거리는 없다. 꼽으라면 전부 앞날에 대한 것뿐이다. 세상살이가 각박함을 알기에, 아이 당자의 의사는 묻지 않고 그를 낳아서 지금껏 길러온 것이 온당한가가 걱정이다.


  훗날 이 세상이 요구하는 패와 자신이 쥐고 태어난 패를 견주어 볼 나이가 된다면 아이는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겨우 이런 꼴이나 보게 하려고 세상에 나게 했어요? 제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기도 힘든 인생인데 그냥 날 내버려두지 그랬어요.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연명하느니 차라리 무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요.


  자기혐오와 세계 부정에 빠지는 것도 그의 자유겠지만 아버지 된 입장으로서는 자식이 그 지경에까지 이르는 걸 당연히 바라지 않는다.


  남은 내 인생의 지향점은 아이가 그럭저럭 참고 견딜 만한 이유를 찾아 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원한다면 어떤 식의 삶이라도 좋다.


  거기에다 하나를 보태자면 장성한 후에도 나나 아내와의 사이가 가까웠으면 하는 것이다. 기왕이면 '자주 보아도 좋은 사이'로서 말이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는 아이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것은, 아마 내가 어렸을 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셨을 일이다. 그때 그분들의 생각을 헤아릴 수 없으니 나는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을 한다.


  내 딸아, 앞으로 중요한 삶의 순간이 올 때마다 항상 너와 함께하마.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가진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너를 지원하고 격려하며 사랑하겠다고 약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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