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마귀소년 Nov 20. 2021

꽃에 물을 줄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다 자란 화초는 많이 보았으되 내 손으로 키워본 경험이 부족하여 걱정이다

촬영 일자: 20210811




  어렸을 적부터 집에는 늘 화초가 만발했다. 화초를 아끼는 부모님의 성정으로 그리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꽃나무들을 고루 사랑으로 돌보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 방에 물그릇에 담긴 행운목을 갖다 놓으시곤, 관리가 어렵지 않으니 가끔 들여다보고 물이 마르지 않게 부어만 놓으라고 이르셨다. 아마 그럴 때마다 행운목을 키운다는 것의 의미도 알려주셨던 듯하다.


  행운목은 이름이 무색하게도 화초를 아끼지 않는 내 성정 탓에 물을 양껏 머금지 못하였다. 나무가 방으로 들어오고 며칠쯤 지나면, 주인은 그를 완전히 방 안의 정물로 취급해버린다. 넘칠 듯 채워졌던 수분이 완전히 증발해버리고 빨아들일 것이 없는 그릇에서 버티고 버티며 말라갈 때까지 냉혈한은 눈썹 하나 까딱하는 법이 없었다. 행운목보다 질긴 생명력으로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는 선인장, 다육이, 이오난사라 해도 불운을 피해가지 못했다. 사막보다도 모진 주인의 무관심은 모두를 불운목으로 만들었다.


  처참하게 말라죽어간 그들을 애도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새로 들이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선물로 들어와도 즉각 부모님 댁에 드려서, 연명할 수 있는 기간을 최대한 늘려보겠다.


  생각난 김에 평상시에 궁금했던 일을 적어본다. 아주 드문 일로써 내가 화초들에게 물을 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가 궁금하다. 그네들은 가타부타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들이 마시기에 알맞은 양을 주었는지, 또 물을 화초가 얼마나 마시고 얼마나 마시지 않는지가 퍽 알고 싶다.


  당연히 그건 세상의 난제도 연구 대상도 아니다. 식물에게 주어야 할 물의 알맞은 양과 주기 같은 건, 당장이라도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물어본다면 친절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요는 내가 화초들을 조금도 '아낌'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몰랐을 뿐이다. 방금 전까지 품었던 식물에 관한 궁금증조차 이 글을 쓰고나면 잠재 의식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시선을 돌려 곤히 잠든 아이를 슬쩍 바라본다. 아이를 향한 사랑스러움과 부담스러움이 동시에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무엇이건 변변히 키워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섬세하고 변화무쌍한 화초를 맡아 기르는 셈이다.


  아이는 햇빛과 물과 양분을 듬뿍 받아들이며 조금씩 조금씩 기틀을 잡아간다. 한 없이 미약했던 씨앗이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며 날로 생장하는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감동은 말로 해 무엇할까. 무한한 기쁨이요 보람이다.


  한편으론 내가 이 아이를 전적으로 맡아 양육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나의 관점으로 늘 충분한 양의 물을 주고 햇빛을 쪼인다고 믿지만, 아이 본인의 관점에서도 과연 그러한지 알 길이 없다.


  아직 사고와 표현이 여물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제게 주어지는 물이 다소 적다고 느끼면서도 그저 참는지 모를 일이다. 혹은 물을 마시고 싶지 않음에도, 부모가 일방적으로 물통을 기울여 억지로 마시게끔 한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주말에 부모님 댁에 놀러 가면 요샌 아이가 손수 화분에 물을 주겠다고 한다. 기특하게 여기며 물조리개를 쥐어 주면, 분별 없는 아이의 손길을 따라 물이 콸콸 쏟아진다. 약간은 화초에 스며들지만, 대부분은 곧장 뿌리를 타고 내려와 화분 바닥에 고인다.


  어머니는 더러 화초에 물을 너무 적게 주면 마르고, 너무 많이 주어도 뿌리를 썩힌다고 하셨다. 내가 아이를 튼튼한 나무로 자라게 한답시고 앞으로 하려는 일의 전부가, 실은 그런 양일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