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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Nov 23. 2021

느지막한 오후 이른 밤 산책

호젓한 거리를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행복

사진 출처: pixabay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부엌을 정리하고, 아이와 놀아주다 씻기기까지 하면 육아에서 퇴근하는 시간이 된다. 오후 8시에서 9시쯤인데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밤이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요샌 해가 짧아져서 사방은 캄캄하지만 하루가 끝날 시간은 아니다. 사람을 만나러 나가는 것 빼고는 다 할 수 있다.

  이대로 거실 바닥에 널브러지거나, 넷플릭스의 인기 콘텐츠 보거나, 산책을 하거나의 선택이 남았다. 오늘 저녁은 기운이 충분히 남아서 밖으로 나가기로 한다. 입고 있던 티셔츠와 반바지 위에다가 조거 팬츠와 후드 집업, 그리고 짧은 패딩을 걸치기만 하면 된다. 분리 수거할 쓰레기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면 갖고 나간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아파트 단지로부터 강변이 무척이나 가깝다. 아파트 후문을 나와 조금 걷다가 횡단보도를 2번 건너면 지하철역 입구가 나오고, 입구를 지나쳐 계단을 오르면 바로 강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산책 경로가 나뉜다. 곧장 다리를 건너 유원지 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다리를 건너지 않고 도로 쪽으로 갈 것인가?

  잠시 망설이다가 다리를 건너지 않는 길을 택했다. 다리와 강 건너의 건물들이 내뿜는 불빛이 캄캄한 강물에 녹아 흩어진다. 이런 풍경에 음악이 빠질 수 없지. 이어폰을 끼고 동네 풍경 위에 크리스마스 캐럴을 덧입힌다. 정확히는 재즈로 편곡된 캐럴 리스트고, 아주 간편하게 크리스마스 기분을 낼 수가 있다.

  추운 날씨 탓에 강둑으로 걷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잠시 호젓한 분위기를 즐기다가 너무 인적이 드무니 재미가 없어졌다. 자연 구경은 충분히 했고, 이제 사람 구경이 하고 싶다. 강둑에서 도로로 통하는 계단을 찾아 내려가자.

  길거리에도 지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 상권이 발달하지 않은 이쪽 동네는 옷집이나 병원 같은 건 애저녁에 문을 닫았고, 어쩌다 보이는 술집에나 사람이 좀 들어가 있다. 불이 켜진 곳이 보일 때마다 손님이 얼마나 있는지 흘끗거리게 된다. 원래부터 손님이 많던 몇몇 곳을 빼곤 직원 수가 손님보다 더 많다. 처음 이 동네로 이사왔을 때까진 그럭저럭 운영되던 가게가 폐업 안내문을 써다붙인 것도 보인다.

  우울한 바깥 세상과 달리 이어폰 속 세상은 시종일관 평화롭고 번영한다. 뉴스에서도 거리에서도 평화와 번영을 찾기 힘드니, 집에서만큼은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싶다.


  마침 집에는 트리 세트가 보관돼 있다. 작년 연말을 앞두고 아이에게 크리스마스를 알려줄 요량으로 마트에 가서 사온 것이었다. 우리는 함께 전나무 모양을 한 플라스틱 트리를 세우고 장식과 전구를 걸었다. 고작 아이 키보다 50cm쯤 더 큰 싸구려 모조품일지라도 벽 한쪽에서 빛을 발하는 모습이 제법 운치 있었다. 생각난 김에 올핸 12월이 시작되자마자 벽장에서 트리를 꺼내야지.

  지하철 두 정거장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간다. 오늘은 더 이상 남은 일이 없으니 걸음이 빨라질 이유가 없다. 가로수 낙엽이 발 아래서 바스라지는 감촉과 뺨을 스치고가는 겨울철 바람의 메마름 같은 걸 하나하나 맛본다. 그러는 동안에 물기를 뺀 근심들이 낙엽마냥 길거리에 툭 툭 떨어져 바람에 날아간다.

  ㅁㅁ은행이 있는 횡단보도에서 한번 길을 건넌다. 약 30분이 걸렸다. 여기까지가 내 산책 코스의 편도 거리다. 건너편으로 가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쳐다보며 다시 걷는다. 저쪽을 걷는 동안 여태 있었던 일을 이것저것 생각했으니 반대편을 걸으면서는 집으로 돌아가서 내일 할 일들을 궁리한다.


  일찍 일어나고, 쇳덩이와 씨름하고, 직장에 나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저녁을 먹는 것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모든 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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