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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Dec 08. 2021

차갑게 우려낸 커피의 풍미

천천히 차갑게 우린 글이 뜨거운 세상에 지친 사람을 식힐 수 있을까

사진 출처: Beanplus.kr




  눈을 비비며 부엌 찬장에서 컵을 찾는다. 카페를 운영했던 친구에게 받은, 주둥이가 넓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유리컵이다. 컵을 찾아 식탁에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냉장고를 연다. 아주 차갑게 보관된 물통과 콜드 브루가 담긴 텀블러를 꺼낸다. 컵에 냉수를 먼저 따른 다음 가장자리 쪽으로 콜드 브루액을 살살 붓는다. 컵 안에서 경계가 모호한 곡선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난다.


  커피가 물속으로 천천히 퍼져나가는 모습은 내가 사랑하는 광경 중 하나다. 직장을 나가는 평일이라면 불투명한 텀블러에 콜드 브루액을 눈대중으로 얼른 붓고는 짐을 챙겨 휑하니 나가버리겠지만, 주말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물과 커피가 유리컵 안에서 조화롭게 섞이는 것을 아름다운 작품인 양 감상한다. 컵 표면으로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확인하고 비로소 한 모금을 입에 천천히 머금는다.


찌르르-

 

  냉기가 입 안에서 식도로, 위장으로 내린다. 빛이 한 번 번쩍인다. 흐리멍덩하던 머리와 오감이 일시에 각성했다. 아까부터 옆에서 종알종알 대는 아이의 말소리도 또렷이 귀에 들어온다. 요는 제가 아침밥을 방금 다 먹었으니 지금부터 재미있게 놀자는 소리다. 주말 아침, 원기가 왕성한 아이와 놀아줄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됐다.


  공복에 들이붓는 콜드브루의 향이 각별하다. 큰 컵을 가득 채운 커피가 지나가는 발길에 채지 않도록 다시 식탁에 올려둔다. 그리고는 거실에 장난감 가게를 차려 아이와 소꿉놀이를 한다. 한참 놀이에 열중하다가 목이 컬컬하면 부엌을 오가며 한 모금 두 모금 즐기는데, 희미한 신맛과 쌉쌀한 맛이 겸한 풍미가 좋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분에 넘치는 호사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겨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차디찬 음료를 마시다니. 난방과 온수 귀한 줄 모르는 도시에서 살고 있지 않았더라면, 지난 밤을 얼음장과 같은 방에서 웅크리고 지샜다면 아이스 콜드브루의 풍미니 뭐니를 논하고 있었을까. 커서가 멈춘 동안 행동의 온당함과 온당치 못함을 생각한다.  



출처: Beanplus.kr


  콜드 브루는 오랜 방황 후의 정착지이다. 나와 아내는 결혼하고 인스턴트 커피스틱에서 출발해 에스프레소 머신, 핸드드립 세트, 캡슐커피 머신 등을 전전했다. 어느 기구든 처음 장만했을 때는 그럭저럭 만족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 이유도 제각각이다. 한 번의 브루잉으로 먹을 수 있는 양이 적어 불만이고 추출 시 기구에 커피가 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캡슐 쓰레기의 양산이 싫고 등등.


  더치 커피가 먼저, 후에는 콜드 브루라는 개념이 일반에게 널리 퍼지고 한참을 지났을 때 아내가 홈메이드 콜드 브루 기구를 사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벽장에 들어갈 사물이 또 하나 늘어났구나 싶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내가 친절히 알려주는 커피 추출 방법을 건성으로 듣고 반대쪽으로 흘려보냈다.


  아내는 메이커로 콜드 브루액을 500ml씩 만들어 냉장고에 차갑게 보관했다. 나는 커피를 텀블러에 조금씩 옮겨담아 직장에 싸들고 갔다. 바쁜 아침에 아무 수고로움 없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점에 차츰 매료됐다. 이 '대량으로 보관할 수 있다'에는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유형의 핫 브루잉 커피에도, 출근길에 드라이브 스루로 픽업해 마시는 커피에도 비할 수 없는 편리함이 있다.


  몇 달이 흐르고 나는 더치커피에 완전히 길들여졌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냉장고를 열면 정해진 자리에 커피가 있어야 했다. 잘 공급되던 것이 갑자기 중단되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란.. 그런 걸 몇번 겪고 나서부터 콜드 브루액의 비축분에 무척 신경을 쓰게 되었다. 원두를 비롯한 소모품 재고량을 주기적으로 확인해 찬장에 넉넉히 구비했으며, 기구 사용법을 익혀 아내 대신 커피를 내리는 습관을 만들었다.

  

  콜드 브루잉은 핫 브루잉과 달리 추출에 긴 시간이 소요된다. 차가운 물이 원두 위로 1~2초에 한 방울씩 떨어지도록 해두면, 500ml 분량을 만드는 데 5~6시간쯤 걸린다. 일주일 내내 넉넉하게 마시고 싶다, 두 번 내려야 한다. 주말 아침부터 시작하여 하루가 꼬박 지나가고 저녁을 먹을 때쯤 큰 물통의 최상단까지 커피를 찰랑찰랑 채울 수 있다. 커피 방울이 기구에서 한 방울씩 똑똑 떨어져 내리고, 그것들이 시나브로 시나브로 모여 큰물을 이루는 광경은 흐뭇하기 그지없다.  


  차갑게 천천히 우러남은 나의 성정과 닮아 있기도 하다. 무엇이든 뜨겁고 빠르게 우려내는 세상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그런 강요가 싫었다. 차분히 나아가는 페이스를 잃고 싶지 않았다.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다. 정수리부터 똑똑 떨어지는 물이 마음을 천천히 우려낸다. 방울져 내린 것들이 모여 작은 샘물을 이루는 광경을 지켜본다. 불순물이 가라앉았음을 확인한 뒤, 샘에 두레박줄을 늘어뜨려 조용히 글을 길었다.


  천천히 차갑게 우린 글이 뜨거운 세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식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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