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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Dec 13. 2021

만찬의 온기

봉우리가 높은 밥과 사발에 가득 담긴 국이 김을 펄펄 내뿜고

사진 출처: pixabay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곧장 저녁을 지어먹는다.


  365일 아침은 간헐적 단식으로 거르고 점심은 직장에서 주는 걸 먹고 있어 집에선 끼니를 한 번만 해결하면 된다. 가족과 함께 먹는 밥이다 보니 기왕이면 배달음식이나 패스트푸드는 피한다. 영양소가 풍부한 천연 재료로 메인 디시와 국을 만들고, 전기밥솥에 새 밥을 짓고, 어머니가 보주신 밑반찬을 서너 가지 곁들여 푸짐한 한 상을 만든다.


  저녁상을 차리는 건 누구의 몫으로 정한 바가 없으나 보통 퇴근이 빠른 아내가 맡는 경우가 빈번하다. 퇴근길에 장을 보고 간단히 손질을 해 두었다가 내가 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요리를 시작하는 식이다. 그동안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이와 놀아주며 시간을 보낸다. 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경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인데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거나, 단시간 내에 뚝딱 차려먹는 메뉴를 준비할 때이다. 맛은 모르겠지만 손은 내가 조금 더 빠른 편이다.


  메인 디시가 다 만들어질 때쯤 아이를 화장실로 데려가 손을 씻기고 나도 함께 씻는다. 아이는 참으로 손이 오밀조밀하고 보드랍다. 저렇게 연약해 보여도 블록이 든 상자를 번쩍번쩍 들고, 귤껍질을 하나하나 까고, 숟가락으로 밥도 떠먹는 걸 보면 신통하다.


  아이를 어린이 의자에 앉히고 나면 본격적으로 만찬이 시작된다. 식탁 가운데에는 메인 디시가 담긴 접시나 냄비 따위가 김을 펄펄 내뿜는다. 그리고 내 앞에는 봉우리가 높은 밥과 사발에 가득 담긴 국이 있다. 만세. 내가 최고로 사랑하는 광경이다. 다른 끼니는 몰라도 저녁엔 반드시 뜨거운 고기 요리나 국물 요리가 있어야 한다. 차가운 고기 요리나 샐러드, 국물 없는 식사는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다. 배가 부르고 나서도 못내 아쉽다.


  점심을 12시쯤 먹고 나면 식간에 보통 아무것도 먹지 않기에 저녁을 먹을 때쯤이면 허기가 최고조에 달한다. 그래서 어떤 메뉴든 간에 아주 달게 먹는다. 맛은 둘째고, 양이 충분하면 일단 만족한다. 어떤 가정에서든 저녁은 배부르게 먹겠지만 난 보통 사람의 1.5배에서 2배는 먹지 않는가 한다. 왕성한 식욕으로 밥과 국물, 메인 요리, 밑반찬, 마른반찬 가릴 것 없이 우걱우걱 먹어치운다.


  정신없이 해치우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아내는 오늘의 대소사를 틈틈이 알려준다. 직장 동료 중에 아무개가 어떤 곳으로 이사했는지, 마트에서 어떤 물건이 세일을 했는지, 집에 돌아오는 동안 어떤 비매너 운전자를 만났는지. 이에 질세라 왼편에 앉은 아이가 제법 능숙해진 말솜씨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어린이집에 누가 어떤 이유로 결석했는지, 점심 식단에서 맛있는 반찬은 무엇이었는지. 하원하는 길에 어떤 꽃을 보았는지.


  두 사람이 모두 나를 향해 동시에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입체 음향의 효과가 발생한다. TV를 틀지 않아도 두 사람이 말하는 소리, 수저가 식기에 부딪히는 소리, 씹고 삼키는 소리로 충분히 풍성하다.


  연신 입에 밥을 퍼 넣으면서 왼쪽 귀와 오른쪽 귀로 들어오는 정보를 동시에 처리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일일이 대응하지 못하고 '응', '아니'와 같은 단답이나 '어, 그랬구나' 같은 애매한 대답으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잦다. 그다지 성의 없지만 어쨌든 듣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정도로 대답한다. 그 정도로 충분한 듯하기도 하다. 이때 주의점은 한쪽에만 집중적으로 듣고 응답하는 티가 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나 아내 어느 한쪽만을 쳐다보며 듣고 있을 경우,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한쪽이 서운한 티를 내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어디서와 마찬가지로 식탁에서 말이 통 없는 편이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는 것에만 몰입한다. 내가 잠자코 있어도 특별히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지만 전혀 서운한 건 없다. 나까지 말을 한다면 말하는 사람만 있고 아무도 듣지는 않는 대화가 되어 버린다. 오히려 질문이 없서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배가 그득해질 때까지 실컷 먹은 뒤, 정리는 밥을 얻어먹은 자의 몫이 된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장 시작하는 편이 좋다. 미뤄두면 영영 손을 놓고싶어짐을 경험으로 안다.


  창문을 열고, 싱크대에 식기 일체를 옮겨 물에 한번 헹구고, 식기세척기에 식기를 차곡차곡 쌓아 작동시키고, 세척기에 넣지 못하는 용기를 모아 설거지하고, 행주로 식탁이며 의자며 레인지 주변을 한 번씩 훔치고, 바닥에 떨어진 찌꺼기들을 주워 담고, 싱크대를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고, 싱크 구멍에 모인 음식물 찌꺼기를 봉투에 담는다. 창문을 다시 닫는다.


  정리를 하고 나면 하루의 일과는 거의 끝이다. 아이와 거실에서 온갖 장난감을 벌여놓고 이것저것 하며 한참을 논다. 배가 부르고 집안에는 온기가 돌아 슬슬 나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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