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아방의 미덕

적당한 무신경함이 좋다

by 까마귀소년

사진 출처: 메가오토



구아방: 1995년에 출시된 2세대 아반떼, 구舊 아반떼의 애칭.


아내는 구아방 오너다. 통용되는 진짜 구아방은 아니고, 4세대 아반떼(hd)를 타고 다닌다. 이는 나의 손윗 동서로부터 아내가 명의를 이전 받은 차량이다. 형님은 명의 이전에 필요한 서류 작업이며 차의 간단한 정비와 소모품 교체 등 온갖 번다한 일도 대신 처리해 주었다. 우린 거저에 가까운 헐값을 내고 자동차를 인도 받았다.


차량은 연식과 10만이 훌쩍 넘는 주행 거리에 비해 전체적인 컨디션이 매우 양호했다. 형님의 말씀을 옮기면, 취직 후에 돈을 모아 장만한 첫 차라 애지중지 관리하며 탔다 한다. 아내 대신 운전석에 앉아 출퇴근을 몇 번 해본 바, 아반떼에 비해 연식이 훨씬 뒤인 내 SUV보다 더 정숙하고 부드럽게 나가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구아방을 이전 받기 전만 해도 아내가 몰 차로서 신형 준중형 세단을 고려했었다. 용도는 직장 출퇴근 및 병원, 어린이집, 마트 같은 근거리 이동이었다. 1시간 이상의 장거리 주행은 내가 전담한다. 말하자면 우리집은 내 SUV가 주전, 아내의 세단은 교체 선수인 셈이 된다.


연식이 짧은 중고 중형 세단도 권했으나 아내가 사양했다. 아내는 초보 시절이나 운전 경력이 쌓인 지금이나 준중형 세단 정도를 본인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경력에 비해 좀처럼 늘지 않는 실력 때문이다. 특히 운전석에 앉은 몸과 자동차를 동일체로 여기고 주변의 공간을 3차원으로 지각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였다.


아내가 운전할 때 보조석에 동승해보면 정말 그 말대로다. 도로 주행보다도 주차나 출차 상황이 문제다. 아내는 차를 주차 공간 안에 집어 넣는 것 자체를 어려워했고, 핸들을 왼쪽으로 틀면서 천천히 전진하라든가 앞으로 차를 뺐다가 후진하면서 주차선에 맞추어 미세 조정하라는 둥의 조언을 곧이곧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모처럼 차를 잘 댔다가도, 용무를 보는 동안 양 옆과 맞은 편에 차들이 주차되어, 출차 시 억겁과도 같은 시간 동안을 쩔쩔 매며 차를 뺀 경험도 몇 번이나 있었다 한다.


자동차의 몸피가 크면 클수록 운전자가 공간을 지각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반대로, 몸피를 최대한 줄인답시고 경차를 몰게 되면 도로에서 무시 당하기 일쑤라(고 경험자들이 증언) 한다. 중간 지대인 준중형 차량을 모는 게 여러 모로 합리적이다. 아내가 차를 구입하려는 시기가 마침 둘째를 낳은 형님이 패밀리카를 장만하려는 시기와 맞물려, 우린 구아방을 데려온 것이었다.

오랜 연식에 가려 처음에는 몰랐지만, 구아방은 몰고 다닐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차다.


첫째로는 환경 보존의 측면에서다. 자동차를 몰면서 항시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자동차가 굴러다니면서 환경을 차근차근 좀먹고 있는가이다. 자본주의와 기업의 입장에서는 좀들이 지구를 잘게 물어뜯음이 미덕일지라도 장차 후손들에게는 확실한 악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서도 필요랍시고 차를 두 대나 몰게 되었으니 악덕을 저지르고 있다. 그래도 나와 아내의 것은 공히 중고차인 데다 배기량이 크지 않으니, 연료의 적은 소비로 보나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는 각종 자원의 절약으로 보나 환경에는 낫지 않은가 한다.


둘째로는 근검절약의 측면에서다. 구아방은 각종 유지비가 크고 좋은 차들에 비해 현저히 적게 든다. 차를 몰기 전에는 그 유지비라는 것이 무엇인지 체감하지 못했지만 이젠 다르다. 다달이 들어가는 주유비에서 시작해 각종 부품비, 정비비, 재산세, 자동차 보험료, 주차요금, 톨게이트 비용에 이르기까지 간헐적으로 들어가는 모든 금액을 연간으로 합산하면 꽤 큰 금액이 된다. 새 차를 사라는 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구아방을 선택했다. 아내의 현명한 선택으로 절약한 유지비가 조용히 살림을 살찌워 왔음을 여실히 느낀다.


셋째로는 무신경함의 측면에서다. 아내는 차를 인수해 직장에 타고다니는 동안 차에 크고 작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인수 받은 시점에도 생채기가 한둘 쯤은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자 도장이 까지거나 움푹 팬 부분이 꽤나 많아졌다. 그것들은 전부 주차, 출차의 어려움으로 인해 벽에다 혼자 긁고 박은 결과다. 한번도 다른 차에 피해를 끼치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다. 흠집을 복원하라고 카드를 주었으나, 아내는 그냥 타고 다니겠다 한다. 문짝 하나를 복원하는 데 드는 비용이 기십 만원이니, 전체를 고치려면 차를 인수한 값만큼 비용이 발생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무엇보다 아내는 문짝의 도장이 좀 까지고 범퍼가 움푹 들어간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건 반복 숙달로도 좀처럼 늘지 않아 애태우는 공간지각력과는 다른, 무신경함이다. 무신경함이란 남의 감정이나 이목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니 그 자체로는 다소 부정적인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이 차의 경우를 놓고 본다면 타고 다니지 못할 만큼 흉한 정도가 아니며, 그로 인해 누군가 위해를 지 않으니 문제가 된다. 당사자가 워낙 태연자약이라 같이 사는 나도 영향을 받았다. 예전에는 다른 차가 내 차 문짝을 긁고 지나간 자국에 무척 스트레스 받고 곧장 복원하려 했는데, 지금은 작은 자국이 몇 군데 생겨도 범인을 잡지 못해도 그러려니 하며 탄다. 차를 모는 데 너무 신경 쓸 부분이 많다보니,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무신경이 필요하다 싶다. 각해보니 사람을 사귐도 그러하다. '적당한 무신경함'의 미덕 지닌 사람이 좋다.




퇴근길.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면서 습관적으로 아내의 차를 살피곤 한다. 아파트 주차장엔 구아방이 여럿 있지만 아내 것은 특유의 흠집이 있어 금방 식별 된다.


어디 보자...


아내의 구아방이 한쪽 벽면에 바짝 붙어 서 있다. 그것의 주인이 오늘 하루를 버텨내고, 무사히 귀환했음을 내게 알린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함께 살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주인이다. 알뜰살뜰한, 그리고 적당히 예민하고 적당히 무신경한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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