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은 매운맛 사람은 순한맛

시처럼 읊어볼까 편지로 적어볼까

by 까마귀소년

사진 출처: pixabay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라면 코너에서 발길이 뚝 멈춘다. 수십 종의 라면이 질서정연히 매대를 채우고 있다. 라면 애호가인 나는 그것들이 내포한 뜻보다 색과 무늬에 먼저 미혹된다. 공산품들이 어쩜 이렇게 벽면을 오색찬란히 수놓고 있을까. 매대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배치된 봉지 하나 하나에는 마트나 라면 회사측의 비의秘義가 도사리고 있을까. 이것들도 현대 미술이 될 수 있을까.


일주일 분의 생필품으로 가득찬 카트 손잡이를 놓았다. 색실로 떠놓은 수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심사숙고에 빠진다. 내 시선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전부 봉지에 담긴 것들이고 왼쪽은 컵에 담긴 것들이다. 일단계는 결정이 매우 쉽다. 컵라면은 제외하고, 봉지면만 살 것이다. 확고한 봉지면 취향이기 때문이다.

이단계는 답습이냐 변화이냐의 문제다. 매대를 빠르게 스캔한 결과 예부터 내려온 것이 2/3, 근자에 생겨난 것이 1/3 가량이다. 벽으로 다가서니 어릴 때부터 먹던 몇 개의 라면이 바로 시선을 끈다. 새로운 것들은 필체부터가 휘황찬란하지만, 시선이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나는 잠깐의 망설임 뒤에 전통 2/3, 새로움 1/3의 비중으로 구매 계획을 세운다.


삼단계는 최종 결정이다. 국물과 비빔과 볶음, 고기베이스와 해물베이스, 매운맛과 순한맛과 같은 세부 선택지가 남았다. 아내와 아이가 다른 코너에서 서성이는 동안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것저것 만지며 숙고를 거듭한 끝에, 고기베이스 국물의 매운맛 라면을 3묶음 사기로 했다. 라면봉지들을 끌어당겨 카트에 집어넣었다. 이제 이번 주 장보기가 모두 끝났다.


라면 애호가답게 하루에 한 끼씩은 라면을 먹고 싶지만, 평일에는 일반식을 먹고 금요일 밤이나 주말 오후에 몰아서 먹곤 한다. 보통은 라면 2개+달걀 2개+밥 1공기, 많이 먹고 싶은 날은 라면 3개+달걀 3개+밥 1공기 수준이다. 그렇게 먹고 나서도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1~2개쯤은 그냥 해치울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와 함께 라면을 먹기 위해 큰 냄비에다 물을 끓인다. 라면 3개를 끓일 것이다. 그 중 내 몫이 2개를 넘고, 아내 몫은 1개가 좀 안 된다. 많이 먹는다고 아내로부터 종종 타박을 듣기도 하지만... 뭐 어쩌랴. 이내 라면이 펄펄 끓고 나는 아내의 몫만큼을 대접에다 옮겨담았다. 나머지는 냄비째로 내 몫이다.


식탁에 마주 앉아 후루룩 라면을 먹을 차례다. 아내는 입맛이 매우 순한 편이다. 그래도 라면만큼은 나와 취향이 비슷해서 내가 고르는 라면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아 좋다. 아 배고파. 젓가락으로 면발을 왕창 집어 볼이 미어져라 밀어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이 왜 나와 함께
매운맛 라면을 먹고 있을까.


우리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날 다른 시에 태어났다. 시작은 달랐으나 어쨌든 지금 여기 앉아 같은 취향의 라면을 나눠먹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람과 나는 라면을 보는 눈만큼이나 사람을 보는 눈이 닮은 것이려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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