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약의 반지

부부의 서약이란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by 까마귀소년

사진 출처: pixabay




결혼 반지는 신념과 가치관을 표현하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도구다. 유부남이라는 일차적인 기호 외에도 내가 동경하는 다양한 이상을 손가락 한 마디에 담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두를 합한 것보다도 서약의 표지로서 의미가 있다. 반지는 처음보다 낡았지만, 그 뜻만큼은 조금도 축나지 았다. 우리가 부부로 탄생하는 과정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날은 결혼식 날이었다. 나와 아내는 새벽같이 일어났고 식장으로 가서 혼을 쏙 빼놓는 일련의 과정을 밟았다. 컨베이어에 올라간 물건의 기분이 무엇인지 알 듯도 했다. 먼저 들어간 남녀 한 쌍이 규격대로 착착 부부가 되어 나왔다. 우린 앞에 지나간 사람들의 자취를 따라 대기실로, 홀로, 식장으로 착착 이동해 갔다.


앞부분은 조금 지루하니 서약 부분이 나올 때까지 비디오를 빨리 감아야겠다. 주례 선생님이 이러쿵저러쿵 말씀을 막 마친 참이었다. 이제 서약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질문을 하신다.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까?


선생님과 하객의 이목이 일시에 쏠린다. 너, 답을 알고 있지? 옳지, 그래. 어서 말해보렴. 땀이 진득하게 밴 등으로 수백의 시선을 받아낸다. 준비해 모범 답안을 써낼 차례다.


이미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기가 아주 중요하다. 한참 망설이거나, 반대로 너무 성급히 대꾸하는 티가 나서는 안된다. 영 딴소리를 한다든지, 잔동작이 있어서도 안된다. 혹여나 흉한 소리를 낼까 봐 목을 한 차례 고른 뒤에 식장이 울리도록 힘차게 대답한다.


곧이어 옆 사람 차례다. 같은 질문을 받은 아내가 다소곳이, 나와 같은 답을 알린다. 휴우. 우리는 여전한 긴장 속에 반지를 나누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이 허상이 아님을 당사자에게 단단히 알리는 증표였다. 이윽고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그것이 조명 아래서 작은 빛을 발한다. 운명의 지침이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열 시를 넘긴 밤이다. 안방에 들어간 아이는 잠이 들었는지 아까부터 소리가 없다. 집안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뿐으로 괴괴하다. 부엌 테이블에 앉아 불빛에 반지를 요모조모 비춰본다.


결혼일 전에는, 부부의 서약이란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실상은 그와 달라 '한숨의 미풍에 날어가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의 삶이란 숱한 다짐을 하고 오래 못가 그걸 내 손으로 폐기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무엇이든 쉽게 잊어버린 다음, 잊어버렸다는 핑계로 허물을 대충 덮어버리곤 했다.


아내는 내 눈빛이, 말투가,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눈치챈다. 가끔은 어떤 부분에서 그리 느꼈는지 조목조목 짚어내어 날 당황케 한다. 궁지에 몰린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반성의 기색을 비쳐야 한다.


실수였다고, 바로 시정하겠다고, 호언장담도 한다. 그러나 위기를 넘기기만 하면 곧장 망각 속에 내버려 두었다. 때때로는 심사가 뒤틀려 끝까지 약속을 어기지 않았노라고 목소리를 높인 적도 있었다.


내가 쳐다보는 반지가 빤히 쳐다본다. 전적이 있으니 이제부턴 다를 거라는 장담도 시원하게 못하겠다. 어쩔 수 없이 반지를 앞에 두고 타협을 본다.


지난날 아내와 내가 한뜻으로 고안하고 지켜나가려 했던 세부 조항을 무효로 만든 책임을 통감한다. 그러나 핵심 조항만큼은 계속 유효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이다. 여러 사람들 앞에 맺어진 그날의 서약이 공언이 아니었음을 오래도록 증명하.


예, 평생 이 사람만 바라보고
이 사람만을 사랑하겠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