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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Dec 17. 2021

뽀로로와 노래해요

아이를 핑계로 내 동심을 맘껏 채운다

사진 출처: ICONIX




육아의 만족스러운 점 가운데 한 가지는, 아이를 핑계로 내 동심을 맘껏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심은 말이 다소 거북하니 사리사욕이라 해도 좋다. 가령 소꿉놀이, 동요 부르기, 블록 조립 같은 걸 이 나이에 즐기려면 남 눈치가 보이는데, 아이와 함께 그런 걸 들여다보는 풍경은 육아에 헌신하는 바람직한 아버지상으로 보이지 않는가. 집에 사놓은 놀잇감, 책, 학용품 등은 종류를 불문하고 내가 즐거이 갖고 논다. 유아 동요도 웬만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수 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만화 캐릭터에 차례로 흥미를 보인다. 작년까지 뽀로로가 단연 독보적이었다. 재작년만 해도 아기상어 노래만 주야장천으로 듣고 캐릭터 상품을 볼 때마다 사달라고 조르더니 그 노래와 캐릭터가 '지겹다'며 단호히 거부하고 뽀로로로 갈아탔다. 단일한 노래와 캐릭터의 반복적인 움직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지능 수준에 이른 게 분명하다.


  작년은 뽀로로가 집을 완전히 잠식했었다. 뽀로로 칫솔, 뽀로로 책, 뽀로로 퍼즐, 뽀로로 스티커, 뽀로로 피규어, 뽀로로 버스, 뽀로로 물총, 뽀로로 실내 수영장, 뽀로로 수영복, 뽀로로 장갑... 아직 끝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해서 물건들이 대거 추가되었다. 아이가 산타 앞으로-사실 나나 아내 앞으로-달아놓은 품목이 서너 종류는 되었다. 이야말로 열렬한 사랑이다. 올해 들어 열기는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은근한 애정은 앞으로도 지속되지 않을까.


  아이는 뽀로로 애니메이션과 스마트북이라는 책을 꾸준히 탐구해 온 결과로 캐릭터 간 관계, OST, 애니메이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다. 아침저녁으로 OTT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영상을 보는 데 재미를 붙였다. 아침 시간대에는 원활한 출근 준비를 위해, 또 저녁 시간에는 원활한 식사 준비를 위해 한 번 두 번 틀어주던 게 시작이었다. 한 번 두 번 보고 듣고 율동을 따라 하면서 내 눈과 귀에도 어느새 익었고 아이 이상으로 뽀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뽀로로를 좋아하는 이유를 한 단어로 압축하자면 '무해(無害)함'이다. 정신세계에 해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꼭 아버지의 눈으로가 아니라 상식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이 세상의 콘텐츠를 바라보건대,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돈벌이를 위한 장삿속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느껴진다. 단적인 예로, 아프리카나 유튜브의 인기 영상 탭에 올라온 것들은 그런 정도가 극에 달한 유라고 볼 수 있다. 보는 사람들에게 피상적이고 천박한 쾌락을 주는 대신, 정상적인 가치 판단 기준을 뒤흔들어놓고 건전한 정신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어떤 것들은 그런 해악을 숨기려는 최소한의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뽀로로 영상을 볼 때 아이를 품에 고서 동심을 간직하고자 하는 한 인간으로 뽀로로의 캐릭터, 세계관, 노래, 스토리 등을 면면히 살펴본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것들이기에 초지일관 모든 것들이 지극히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교육적인 효과를 내포하고 있다. 돈벌이를 위한 어른들의 속내 같은 건 아주 희박하게 느껴질 뿐이다.


  무엇보다 10명 내외의 뽀로로 메인 캐릭터들의 관계가 마음에 쏙 든다. 뽀로로라는 펭귄 캐릭터가 가장 상징적이기는 해도, 한 편의 영상 속에서는 그 비중이 다른 캐릭터들과 그리 차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린이 애니메이션들이 그러하듯 등장인물들이 갈등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100% 예측 가능하다. 가령 뽀로로가 크롱이 갖고 놀던 자동차를 뺏아서 싸움이 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면 뽀로로가 자동차를 뺏는 시점부터 결말까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훤히 알 수 있다.


뒤는 대체로 이렇다.

1. 서로 다툰 뽀로로와 크롱은 토라져서 냉각기를 갖는다.
2.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친구들이 뽀로로를 찾아가 타이른다.
3. 뽀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반성한다.
4. 뽀로로가 사과하고, 크롱은 이를 받아들여 다시 전처럼 좋은 관계를 회복한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서사가 진부해서 시청자들에게 욕이나 먹겠지만, 이런 흐름이 무해함의 측면에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것이다. 인간관계라는 게 현실에서는 절대 저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음을 알기에. 잘못을 저지른 편이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또 상대가 관용을 베풀어 원만한 화해에 이르는 일련의 상식적인 과정을 가상 세계 속에서라도 확인하고 싶다.


  또한 포비, 해리, 루피와 같은 제삼자들이 당사자의 갈등에 관심을 갖고 공감해주며 일을 바로잡으려고 적극 나서는 모습이 너무나 부럽다. 뽀로로 세계에서는 공감과 배려, 공동체 의식과 같이 현실 세계의 어른들이 오래전에 상실한 가치들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살아 숨 쉰다.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내 눈에는 어쩐지 생경하게 비치는 감마저 있다.




  나는 점잖은 사람들이 모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구성원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 수준을 갖추고 있으며 명예와 수치심이 무엇인지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근래 몇 년 사이에 수뇌부의 뜻에 의해 특정한 소수에게 이익이 우선으로 돌아가는 구조가 고착되면서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공감과 배려는 온데간데없고 각자의 이익 보전에 안간힘을 쓰는 게 보인다. 이래서는 직장이 잘 굴러갈 수가 없다. 망조다.


  수염이 숭숭 난 어른이 네 살 먹은 아이처럼 뽀로로 영상을 즐겨보고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위로받는 게 이런 현실의 괴로움에서 상당 부분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뽀로로 월드가 그저 판타지 세상일 뿐이라고 해도 좋다.


  두 발을 땅에 디딘 채로 아름다운 별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어른이가 잃지 말아야 할 동심일 것이다. 공동체 내의 일에 늘 관심을 갖고 사람들의 감정에 공감해주며, 그릇된 바가 있다면 바로잡으려고 적극 나서는 현실 세계의 어른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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