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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Feb 04. 2022

촌사람의 서울 기행문

수서행 SRT를 타고

사진 출처: andreaseoul.com




  지난 3년간 근력 운동과 대식大食을 병행한 결과로 착실히 몸이 불어났다. 근육은 적당량 그리고 지방은 다량이 몸에 구석구석 자리잡아갔다.


  당연한 결과로 기존에 입던 옷들이 몸에 꽉 끼게 되었는데 셔츠나 니트는 그럭저럭 봐줄 만 했지만 재킷의 품이 가슴팍에 비해 한참 모자라고, 숨을 힘껏 참아야 바지 지퍼가 올라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 샀을 때만 해도 허리춤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통에 입기 어려웠던 수트는 몸에 착 달라붙어 여유로움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옷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 운동의 긍정적인 결과라 여기고 흐뭇했다. 어느 날 외출을 하려다가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옷의 사이즈만이 아니라 패턴도 내 몸과 맞지 않게 되었구나.    


  생각이 그에 미친 날로부터 옷장에 걸린 옷들이 낯설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정을 갖고 관리했던 옷가지들이 멀찍이 어졌다. 그들이 내 자신을 제대로 뒷받침해주지 못한다는 의심이 작게 싹터,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우더니,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자리잡았다. 재편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백화점 브랜드를 제외해놓고 클래식한 스타일의 옷을 찾다보니 서울의 압구정 일대에 포진한 남성 전용의 편집숍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사는 곳과 주변 도시에 있는 편집숍까지 싹 망라한 것보다 더 많은 가게들이 서울에 몰려 있었다.

 

  편집숍 홈페이지와 매장 방문 후기들을 싸그리 찾아보고는 한번 방문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적당한 날을 잡아 아내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수서행 SRT 표를 예매했다.


  옷을 보러 가기로 한 당일. 이른 시간에 눈을 떠 세안을 마친 뒤 미리 코디해 둔 옷을 입었다. 검정색 집업 니트 안에 흰색 옥스포드 셔츠를 받치고, 검정색 울 팬츠를 입었다. 아우터로 감색 싱글 코트를 걸친 뒤 밝은 회색 머플러를 둘렀다. 어플로 당일의 서울 기온을 확인해보니 겨울치곤 꽤 포근하고 미세먼지도 없다 한다.  


  역으로 가서 8시에 출발하는 수서행 SRT에 몸을 실었다. 수서까지 가는 동안 눈을 조금 붙였다가, 앞 좌석의 등받이에 걸린 잡지를 뒤적이다가, 메모장을 켜서 예정한 동선과 일정을 꼼꼼히 확인했다.


1. 수서역에서 내려 곧장 수인분당선을 탄다.
2. 압구정네거리역까지 가서 편집숍까지 도보로 이동한다.
3. 춘추용 네이비 재킷 한 점, 추동용 트위드 재킷 한 점을 산다.
 3-1. 수선이 필요하다면 수선집으로 가서 옷을 맡긴다.
4. 서울에 사는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는다.
5. 압구정네거리역으로 돌아와 수인분당선으로 수서역까지 이동한다.
6. 집으로 돌아오는 SRT를 탄다.


 아니, 수인분당선은 언제 또 생긴거람. 서울에 잠깐 살 때 9호선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서울 갈 일이 있어 한번씩 지하철 노선도를 확인할 때마다 나는 패닉에 빠진다. 이미 충분히 복잡하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한참이나 더 뻗어나간다.


지방러가 보는 서울 노선도입니다. 출처는 불분명.


  어쨌든 내겐 지도 어플이 있으니 어플에서 시킨 대로만 따르면 그리 헤매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두 시간이 채 안되어 나는 강남에 도착했다. 사람으로 가득한 지하철을 타고 점찍어 둔 숍으로 향했다. 압구정네거리역 출구로 나와 숍으로 가는 동안 주변 풍경에서 지하철 노선도와 유사한 인상을 받았는데, 서울은 참 여백 없는 도시구나, 하는 것이었다.


  송곳 꽂을 자리조차 남겨두지 않겠다는 거대 세력의 주도면밀함일까. 아니면 울타리 안에 송곳이라도 꽂아보려는 저마다의 고군분투일까. 어느 쪽이든 서울 이곳은 지나치리만큼 빽빽하구나. 가로수의 가지들이 성길 대로 성긴 철에 찾아왔음에도 이렇게나 빽빽하다.


  여백 없는 옷을 억지로 입으며 지낸 얼마 전의 일이 생각났다. 조금 끼지만 그럭저럭 입을 만하고 생활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몸을 옷에 끼워맞추고 있었지.


  그래, 그건 불쾌함이었다. 여백 없는 도시는 내게 그런 유類의 불쾌함을 들이밀고 있었다. 잠깐 들렀다 떠나는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잠시 겪다 말 것이지만, 어떻게든 이곳에 발을 붙이려는 사람들에게는 콱 숨통을 조이는 강요일 것이 분명했다.


  상하좌우로 고개를 돌려도 시원스레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니 곧장 목적지로 향하는 수밖에 없다. 5분 남짓 걸어 숍에 도착했다. 오면서 보니 이곳 역시 주변의 건물들 틈에 낀 모양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오픈한지 30분도 되지 않았을 때라 객은 아무도 없었고, 덕분에 매니저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 옆에 붙어 옷을 봐주게 됐다.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생각해 둔 옷을 피팅해보았다.  


매니저와 나


  예상했던 사이즈에 비해 매니저는 한 사이즈가 더 큰, 54를 권했다. 입어보니 과연 어깨와 품이 넉넉하게 맞으면서도 뜨지 않고 몸에 감겨들었다. 재킷을 바꾸고 거울 앞에 서니 이번엔 통이 좁은 바지와의 궁합이 어색했다. 당초 예정에 없던 바지도 추가하기로 했다.


  매니저가 추천한 조합은 마침 책에서 읽은 '가장 아름다운 클래식 코디네이션'이라는 네이비 재킷-화이트 셔츠-그레이 팬츠이었다. 빠진 것은 준비해가지 않은 네이비 타이뿐이다. 입고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간결하고 정직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매니저도 딱히 아첨한다는 느낌 없이 새로운 코디의 장점을 일러주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춘추용 네이비 재킷에 이어 추동용 재킷도 입어보겠노라 했다. 생각해온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옅은 갈색
2. 트위드 조직(굵은 양모를 사용하여 평직 또는 능직으로 직물을 짠 다음, 축융, 기모 따위의 방법으로 가공을 한 직물)
3. 헤링본 체크(청어의 뼈 모양 무늬)나 하운드 투스 체크(개의 이빨 모양이 일렬로 배열된 무늬)


  세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재킷들이 품절이라 아쉬운 대로 사이즈가 되는 갈색 재킷들을 전부 부탁했다. 매니저가 꺼내주는 옷들을 시간을 들여 세심히 살펴보았다. 마음이 가는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최종적으로 갈색의 글렌 체크 재킷을 골랐다. 그리고 바지가 한 점뿐인 것이 걸려 짙은 갈색 울 팬츠도 추가했다.


  울 재킷 두 점, 울 팬츠 두 점을 고르는 데 1시간 반 가량이 소요됐다. 백화점이었다면 매장 한 곳에서 이리 오래 옷을 살폈을까? 어깨와 허리 정도만 맞춰보고는 후딱 사서 나왔을 것이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 손님에게 시종일관 친절하게 응대하며 적절한 조언까지 해 준 매니저 덕에 필요한 옷을 제대로 골랐으며, 클래식 복식의 이해도도 상승했다. 

 



  매장에서 1시간 반을 머무르는 동안 친구가 그곳까지 찾아와 사진을 찍어주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는 본투비서울러로서 졸업한 이후에도 우정이 끈끈하다. 서울에 올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만나는데, 이번에는 허락된 시간이 촉박하여 아쉬운 대로 청담동과 압구정 일대를 같이 걸었고 같이 점심을 해결했다. 


 내가 좋아해 마지 않는 서울러의 서울살이 이야기엔 빠지지 않는 것이 세 가지다. 일, 미식, 사람.


  그의 . 고되다. 과도한 양에 쫓겨 느긋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전문성과 책임감으로 일을 완수하고 그에 비례하는 대가를 받고 있지만 받은 만큼 자기 것을 내어놓는다는 느낌이 강하다.


  미식(+술)과 사람. 아낌이 없다. 어렵게 버는 돈이 좋아하는 것들 향해갈 때 그는 물꼬를 활짝 열어둔다. 수압의 조절 없이 흘러들어오는 그의 진심. 나는 같은 압력의 마음으로 그에게 감응하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열차 시간이 가까워온다. 친구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친구는 제 갈 길을, 다시 나는 압구정입구역 계단으로 내 갈 길을 간다. 


  SRT가 수서역 플랫폼에서 출발한다. 서울서 한 발짝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펜과 수첩을 꺼내어 내가 다녀온 곳의 의미를 생각 나는 대로 써 본다.  


  육첩방은 남의 도시. 대학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 곳. 문화예술의 본거지. 63빌딩과 남산 타워, 한강의 괴물. 낙산 성곽과 대학로의 낭만.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공존. 한때 동경이었으되 끝끝내 정붙이지 못하는 타향. 끝없이 생성하그만큼 허물어지는 생물체. 한눈에 들여다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변화무쌍한 유기체...


  그러나 어쩐 이유에선지 금번에는, 압구정 거리와 재킷과 절친한 친구만으로도 나는 서울을 전부 둘러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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