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한풀 꺾이고 먼지마저 없이 화창한 오후였다. 볼일이 있어 잠깐 외출하는 길에, 어린이 한 명이 놀이터벤치를 놔두고 바닥에 쪼그려앉아 뭔가에 열중하는 걸 본다. 나무작대기로 바닥을 쿡쿡 찌르고 있다. 개미굴을 찾는 것이려니 하며 뒤를 지나치려는데 문득 몸을 홱 돌려 나를 본다. 나도 그의 얼굴을 본다. 잡티 하나 없이 하얗다.
"삼촌 안녕하세요?"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우리 캐치볼할래요?"
보이지 않는 공 하나가 날아온다. 버릇 없는 삼촌이란 비난을 듣고 싶지 않으니 발길이 뚝 멈추고 대답을 생각한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려면 숙고가 필요한데 시간이 촉박하네.
구기는 정말이지 젬병인데. 아니 그것보다, 날 아니? 나는 너를 모르는데. 쟤는 내 성별이, 나이가, 덩치가 아무렇지도 않나? 엄마는 널 두고 어디로 간거야. 어휴, 한다고 했다가 몇 시간이고 계속 하자면 어쩌지. 성가실텐데. 그래도 어찌 됐든 단칼에 거절하긴 좀 그렇지?
"어...어."
<응>도 <그래>도 아닌 엉거주춤한 대답이 떨어지자 화색을 띠며 멀찍이 달려가나 싶더니, 이번엔 연두색의 공이 날아온다. 앗, 공을 떨어뜨리면 안 되지! 엉겁결에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깃털처럼 보드랍고 스스럼 없는 무언가가뿌듯하게 들어왔다. 그 기분이 뭔가를 규정한답시고 공을 내려다보는 잠깐의 지체를 기다리지 않고
"빨리 던지세요!"
"어...어. 알았어."
나는 저이의 체구와 팔의 힘을 어림짐작해서 적당한 높이의 포물선을 그렸다. 이내 저쪽에서도 손에 감겨드는 공의 소리가 들리고는 다시 작은 포물선으로 내게 날아온다. 우레탄 바닥에 튕겨져 먼저보다도 작은 포물선이 생기려 하여 나는 공을 따라 재게 움직였다. 놀이터 바닥에는 햇살이 부서져 눈이 부시다.
곧바로 던지지 않으면 또 재촉하겠지? 공이 한번의 바운드도 없이 작은 손으로 빨려들어가게끔 힘을 미세하게 조정해서, 보낸다. 그러니까 나는 조금 전에 하려던 일이 분명히 있었는데...뭐였더라. 아, 오늘 아무래도 쟤한테 걸려든 기분이 드네.
열린사람이 있다. 열린사람은 스스럼이 없다. 내가 허용 범위로 지정한 간격까지 바싹 다가서서는, 미소로 사뿐히 안착한다. 한번은 아이의 얼굴로 또 한번은 할머니의 얼굴로 내 세계에 들어와 공놀이를 하자고 조른다.
나는 그들의 미소에 이끌리어 번번이 패하였다. 처음에는 주저하였을지라도 결국에는 공놀이를 마다하지 못하였다. 그들과의 인연은 매번 같다. 처음에는 마지 못해 시작했다가도 부지불식 간에 흠뻑 빠져들어 나중에는 내쪽에서도 좋아져버리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닫힌 사람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허락도 없이 내 간격을 구둣발로 짓밟는 자들. 나는 소심한 성격 탓에 번번히 패하였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는 그들에게서 온 공을 받아내기만 할 뿐 내쪽에서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열리려는 사람이다. 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
밀실에서 세상으로 한발짝 나서면 멀리서부터 티끌 섞인 바람이 불어온다. 뿌옇고 부분적으로 붉은 기가 도는 불길함은, 열리려는 반대 방향으로 나를 강하게 밀어붙인다. 문을 부여잡고 닫히지 않게끔 애써야만 한다. 넋을 놓고 있으면 마음이 문설주든 어디든 부딪혀 벽력 같은 소리를 낼 것이 자명하다. 열린사람이 아니기에 열리는 비결을 알지 못하고 영영 닫힌사람이 되는 것만큼은 피하려고 안간힘을 다해 맞선다.
여태열린사람들의 공도 닫힌사람들의 공도 그저 받기에 익숙한 인생이었다. 가까스로 몇 명의 열린사람들과 연을 맺고 그럭저럭 삶의 흉내를 내어 살아가고 있지만,내쪽에서 먼저 캐치볼을 하자고 나서는 것은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닫히려는 문을 온몸으로 막아서서 아랫배로부터 용기를 짜내어야 하는 힘겨운 일이다.
스스로 열리려는 사람이라 명명하였으니, 직접 붙인 이름에 책임을 느끼고 살아가고 싶다. 열린사람들이 밝고 힘차게 뿌리는 공을 받음에 주저하지 않고 힘이 부쳐 닫히려는 사람에게 부드럽고 따스한 공을 던져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