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하는게 잘못된건가요?
석희는 자신의 몸에 낙서를 했다. 살짝 상처가 나서 그 주위를 초록색 색연필로 칠했다. 초록색 색연필로 칠하다보니 잘 테가 나지 않아서 갈색을 사용했다. 제법 ‘멍’이 든 것처럼 보였다. 우찬이가 그 모습을 보며 재밌겠다고 생각했는지 따라하기 시작했다. 우찬이는 석희에게 말했다. “야, 나는 멍이 아니라 상처를 그려보겠어!” 우찬이는 빨간색과 검은색 볼펜을 사용하여 몸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이 몰려왔다.
“뭐하는 거야?” “상처만드는거야. 진짜 같지?” 석희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너도나도 몸에 상처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 지민이가 우찬이의 팔을 잡고 말한다. “야, 내가 상처 그려줄게.” 지민이는 우찬이의 찡그려지는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낄낄거리며 상처를 그렸다. 석희는 그 모습을 보고 같이 우찬이의 다른 쪽 팔에 상처를 그리기 시작했다.
담임교사는 급식실에서 우찬이의 팔을 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우찬이는 괜히 찔려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낙서요.” “이 낙서는 어떤 낙서인가요?”교사의 질문에 우찬이는 할 말을 잃었다.
오랜 시간 교실에서 함께하는 학생들은 서로의 행동과 가치관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학생이 행한 행동의 이유를 물어보면 “친구가 해서요.”라고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다.
실제로 학생들은 친구를 모델 삼아 그들의 모든 행동을 보고 배운다. 친구를 보고 배우는 아이들의 성향은 긍정적인 행동이 자연스럽게 전해진다는 점에서 좋지만 부정적인 행동조차 쉽게 전달될 수 있다는 불안한 요소도 가지고 있다.
한 학생이 ‘그냥’, ‘재미’로 시작한 행동을 보고 다른 학생은 ‘친구가 한 행동’이니까 관심을 보였고 그런 행동을 주변 학생들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교실에서는 이런 비슷한 상황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한 학생이 그 행동이 가지고 있을 수많은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했다.
물론 어른들 역시 행동 하나에 생각을 연결 짓는 것이 아니기에 아이들의 행동이 예측가능하지 못하며 돌발적인 것은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문득, 학생들이 행하는 ‘위험한’. ‘의아스러운’ 행동을 볼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그들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그러한 행동을 친구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모방하는 경우이다. 단순히 상처를 그리는 행동은 귀여운? 장난으로 웃어 넘길 수 있지만 실제로 상처를 만드는 행동들, 친구들의 잘못된 행동을 모방하는 일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학생들의 행동과 장난에 어떤 ‘기준’이 필요할지 고민이 된다.
자신의 행동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아 발생 된 일들.
뚜렷한 목적이 없는 단순한 장난.
이러한 아이들의 장난에는 정말 문제가 되지 않았던 행동과 문제가 될 수 있는 행동, 문제가 되는 행동들이 있다.
교사는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진 행동과 문제가 되는 행동들을 주시하며 교육하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 행동을 마주한 순간, 그 순간을 지도할 때면 교사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닌지, 과민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담임교사와 이야기를 나눈 학생들은 그 행동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며 깨우치게 된다. 아이들은 ‘정말 몰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또한 실제로 모든 학생들의 모든 행동들이, 특히 부정적 행동들이 반드시 친구들에게 전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학생들의 표정을 볼 때면 내가 너무 과민한 것은 아닌지 하는 거꾸로 나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정말 즐겁게 행한 장난이고, 그 시간동안 친구들과 즐거움을 경험한 아이들에게 단지 ‘스스로 상처를 낸 자국을 그렸다는 이유로 ’하지 말아야할‘ 행동으로 단언짓는 내가 예민한 것인지. 그러면서 그렇게 실제와 비슷한 모습을 그린 학생들의 상처 그리는 재능?을 인정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아이들의 단순한 장난을 순수한 ‘장난’으로 받아줬으면 학생들은 저마다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친구들 사이에서 쉽게 전해지고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혹시나’하는 마음에 그저 웃으며 바라볼 수 없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 줄 수 있는 어린이의 눈을 가진 어른일까. 고민해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