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전의 함정
어머니께서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보며 종종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너 이러는 거 애들도 아냐?”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24시간 청결하고,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할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 나는 아이들보다 학교가 기를 더 싫어하고 어떻게 하면 돈 많은 백수가 될 수 있을지 망상하는 사람이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무단횡단도 하고 가끔 삶이 좀 팍팍하면 외장 하드에 가득 담긴 아이돌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떡진 머리를 긁기도 한다. 이러다 얼굴에 곰팡이 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며칠 동안 볕도 안 쬐고 누워만 있기도 하고 가족들 앞에서는 방귀도 뿡뿡 뀌거나 PC방에 가서 게임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지적 허영심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읽지 않은 채 꽂아놓은 책만 벌써 열댓 권이 넘었다. 그래서 저런 말씀을 들으면 좀 찔릴 때가 있다.
교사는 외부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가 계속 충돌하는 직업이다. 사회에서 어떤 집단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도덕심이나 역할이 있다면 교사에게는 그 기준치가 유독 높은 느낌이다. 나도 지질한 자아와 완전무결한 자아 사이에서 인지부조화를 많이 겪는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역할에서 해방되고 싶은 곳이 집인데, 학교 밖에서까지 교사의 역할을 요구하면 솔직히 말해서 좀 지친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 사실을 좀 빠르게 깨달았던 것 같다.
학교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쓰라고 하면 어렸을 때부터 늘 슈바이처라고 썼다. 슈바이처를 진심으로 존경해서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쓸 말이 없어서 빈칸을 채우는 용도였다. 우리 부모님은 태몽으로 용꿈이나 북두칠성 꿈은 못 꾸었지만 내가 훌륭한 위인으로 자랐으면 해서 30권짜리 위인전 세트를 사주셨다. 부모님께 죄송한 고백을 하자면 그나마 내가 읽었던 것은 삽화가 내 취향이었던 헬렌 켈러뿐이었고 그마저도 삽화 감상용이었다. 왠지 위인들은 좀 ‘사람답지’ 않은 느낌이라 이렇게 한 없이 지질하고 평범한 나와는 다른 차원에서 사는 인물들 같았다. 박물관에 전시된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도자기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존경하는 인물 하나 없었던 나인데, 아이들은 존경하는 인물 보듯 나를 보니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인간은 절대 완벽하지 않다는 진리를 체득했기 때문에, 두 개의 자아에 대한 괴리감에서 오는 양심적 가책도 있고 성인으로서 좋은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다. 결국 학교에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끔씩 학급 문고에 꽂힌 위인전을 보면 왜 그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거부감이 있었는지 이해가 된다. 간디가 어린 여자 아이들과 동침했다는 사실이나 아인슈타인의 심한 여성편력을 어떻게 위인전에 실을 수 있었겠는가. 인간은 입체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위인만은 지질해서는 안 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대체로 위인들의 결점은 사전에 모두 삭제되거나 사후에 배신감으로 박제되는 길을 걷게 되는 것 같다. 평범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들의 지질한 점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것을 위인전의 함정이라고 여긴다.
이런 의미에서 학교에서는 ‘존경하는 인물’의 이름을 쓰자는 것인지 ‘유명인’의 이름을 쓰자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차라리 인물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행위에 집중하면 방향이 좀 더 명확해질까? 확실히 유명인의 이름을 성의 없이 쓰는 것보다는 ‘약자에게 무릎 꿇을 수 있는 사람’,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눈을 치우는 사람’ 등 존경받을 만한 구체적인 행위를 쓰는 편이 훨씬 와 닿는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그 한계를 뛰어넘는 행위를 한 것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위인전의 함정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확실한 건, 나는 위인전에서 말하는 위인은 절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역시 나는 위인전보다는 자서전이나 평전이 좋고, 지질한 면은 있었어도 다른 건 꽤 괜찮았던 사람 하나로 기억되는 편이 더 좋다. 제일인 건 나 같은 어른이라도 괜찮다면, 한 아이가 내게 해주었던 말처럼 닮고 싶은 어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늙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