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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Nov 26. 2018

그대는 내 아픈 손가락

특수학급에서 만난 학생들 이야기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을까. 나는 15년 동안 네 학교를 거쳐 왔다. 이제껏 특수학급에서 만난 학생들을 모두 합하면 서른 명이다. 초등학교 특수학급의 법적 학생수가 최대 6명이지만 상황에 따라 한 해에 2~8명의 학생을 만났다. 그리고 그 학생들이 졸업을 하기 전까지, 내가 근무지를 옮기기 전까지는 해를 거듭하여도 만남은 유지되었다. 일반 교사가 한 해에 한 교실에서 담임을 하며 만나는 학생이 서른 명이다. 서른 명의 학생들을 1년에 만나면 어떨까? 무지개 색깔보다 각양각색의 성격과 장애가 있었고, 하루하루의 날씨보다 더 가늠할 수 없는 컨디션을 보였던, 내가 만난 학생들을 생각하면 엄두가 안 난다.    


  성운이는 살얼음 같았다. 일대일 수업에서도 그림책을 읽다가 목이 꺾여 이마를 책상에 찧기 때문에 나란히 앉아서 수업을 해야 했다. 눈을 힘주어 깜빡이는 전조증상이 나타나면 내 손을 성운이의 가슴 앞에 받쳐야 했다. 하루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친구들 앞에서 쓰러졌다. 그대로 오줌을 싸서 내 스카프로 덮어 가리고, 친구들을 다른 코너로 가도록 안내하였다. 성운이가 발작을 하는 동안 자기의 뒤틀린 경련을 자신은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본인 이외의 사람들은 다 보고 모두 기억을 한다. 성운이 입장에서는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자신도 보이는 줄도 모르고 버젓이 노출이 된다. 하루는 급식실에서 물 마시다가 대발작을 하여 윗 앞니가 창틀에 부딪혀 빠졌다. 성운이를 업고 보건실에 달려가서 응급처치를 맡긴 다음, 우유를 들고 급식실에 달려가서 바닥에 떨어진 앞니를 주워 담았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앞니 하나는 병원에 가서 성운이가 누워서야 윗잇몸에 치아 끝까지 박혀있다는 걸 알았다. 

  성운이는 다섯 살 때 항암치료를 받았고 그때부터 지적장애와 뇌전증이 시작되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발작을 했고, 수업 중에 책상 뒤로 넘어가지 않고 도보 중에 쓰러지지 않도록 늘 활동 지원이 필요하였다. 아프기 전에 불렀던 동요와 했던 말들은 할 수 있지만, 어휘가 확장되거나 대화를 주고받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따라하는 반향어가 주요 발화였다. 점심을 먹을 때마다 반찬 이름을 말하며 맛있다고 말해주었다. 어머니께서 성운이가 저녁에 콩나물 반찬을 먹으면서 “콩나물 맛있다!”고 말해서 울컥했다고 다음 날 등굣길에 말씀하셨다. 

  성운이는 연필을 쥘 수는 있지만 시계추처럼 왔다갔다만 하지 실선을 덧대어 그을 뿐, 스스로 두 점을 연결하기 어려웠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선생님을 집중하여 보거나 책을 보지 않고 불쑥 “야!”하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배변 욕구를 말하지 않아서 주기적으로 화장실에 데리고 가야 했다. 통합학급의 시간은 활동 중심인 음악, 미술, 체육교과였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특수학급에 있었다. 보조 선생님이 있어도 지원이 필요한 다른 학생의 통합학급 시간에는 그 교실에 가서 지원을 하기 때문에 성운이를 온종일 지원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와 시간을 맞물려 통합학급에서는 반드시 보조 선생님이 지원을 하고, 특수학급에서는 내가 전적으로 담당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특수학급에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할 때도 내 손 하나는 성운이를 잡고 있어야 했다. 

  누군가는 성운이를 보면서 혀를 찼고, 누군가는 어머니의 지극 정성에 감탄을 하였다. 누군가는 성운이가 특수학교에 가야 하지 않겠냐고 슬쩍 물어보기도 했고, 누군가는 성운이 옆에 있는 나를 ‘천사’라고 불렀다. 성운이가 6학년이었지만 선 긋기도 내가 그의 손을 덮어서 잡고 같이 연필을 쥐어서 했으므로 수업 시간에 어떤 성취기준에 도달했다고 말하기 난해한 학생인 것은 분명했다. 특수학교에 가더라도 분명 다른 중증의 장애를 가진 학생들도 섞여 있어서 성운이만을 지원할 수도 없고, 성운이에게 적합한 교육활동이 매 시간 이루어진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만날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연필을 잡고, 이해하지 못한 말을 따라하고, 대화가 어렵다. 친구들과 인사만 겨우 나누고, 할 수 없는 활동들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물리적 통합이 성운이에게 의미가 있고, 성운이가 필요로 하는 상황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성운이는 담임선생님을 보면 좋아서 달려가 안겼고, “선생님님,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란 인사도 하였다. 친구들을 보면 응시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특수학교이든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이든, 성운이도 학교에서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점심 먹은 5교시는 조작을 해야 하는 블록이나 음성 강화가 지원되는 교구를 사용해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집에서 가만히 앉아있으니 운동도 해야 했고, 한 시간이라도 생기 있게 보내고 싶어서 학교 산책을 하기로 맘먹었다. 어떤 날은 울타리에서 나팔꽃 씨를 받아 세어보고, 어떤 날은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를 관찰하며 개미 길을 손가락으로 따라가 보았다. 어떤 날은 나뭇잎을 주워 와서 색상환에 맞춰 붙였고, 어떤 날은 감나무의 감이 몇 개가 열렸는지 세었다. 어떤 날은 모래사장에서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렸고, 어떤 날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에서 성운이는 참 환하게 웃었고 나는 어쩌면 이 순간이 또 있을까, 싶어서 사진을 찍었다.

성운이와 가을 나뭇잎을 색깔별로 주으며 산책하고 찍었다.

  일교차가 커지면 성운이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자주 지각을 했다. 1교시 끝나고 나서야 등교하면서 선생님 주겠다고 주워왔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운이가 나에게 깡충거리듯 뛰어와서 "선생님.."하고 부르더니 단풍잎을 던졌다. 성운이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은 고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끔 하던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인사말조차 2년이 다 되도록 못 듣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질세라 얼른 단풍잎을 잡았다. 성운이는 이미 던지고 돌아서서 교실을 뛰어다니는데, 나는 혼자서 단풍잎을 맡으며 “오늘 선생님 일기장에 꼭 끼워둘게요, 고마워요!” 격양되어 다짐했다. 


  찬바람이 나면 성운이는 입안이 헐어버린다. 입맛이 없어서 밥을 잘 못 먹고, 맑은 침을 흘리기도 한다. 2교시가 시작이 되어도 오지 않더니 어머니께서 평소와 다르게 말씀을 아끼며 보온 도시락을 들고 성운이랑 교실에 들어오셨다. 아침 내내 죽으로 실갱이를 하였고, 성운이가 입을 벌리지 않아서 한 숟가락도 못 먹었단다. 마침 2교시 수업이 성운이 혼자라 죽도시락을 꺼내 한 숟가락 내밀었더니 바로 받아먹는다. 아침 일찍 죽을 끓이고 든든하게 한 술이라도 먹이려 했던 어머니는 “니 어미는 뭐냐.”하시며 한숨 쉬고 돌아가셨다. 저녁에 밥을 먹지 않으면 나에게 전화를 거셨고, 내가 밥 먹자고 말하면 성운이는 그 말 따라 한 숟갈 씩 받아먹었다. 

  졸업을 하고도 성운이가 입맛이 없으면 어머니와 만나 칼국수집에 간다. 우동과 칼국수 면을 호로록 잘 먹는 성운이 입을 보면 어머니도 나도 먹는 걸 잊고 성운이만 바라보며 웃는다. 어머니께 전화가 와도 바로 못 받고나면 지금 만나고 있는 학생들과의 일들로 다시 전화를 드릴 짬을 놓친다. 며칠 지나 아차 싶어 전화를 드리면 한동안 아팠고 이제 나아간다고 하신다. 

  성운이가 졸업하던 날, 어머니께서 손수 바느질을 하셔서 만든 필통을 건네셨다. “선생님 멀리 공부하러 가시는데 이거 쓰시면서 성운이 생각해주세요. 아무 것도 안 받으시니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거 드리니 받아주세요.” 하신다. 우리반에는 장애가 있는 부모님도 있고, 가난해서 또는 바쁘셔서 나랑 소통하지 못하는 부모님도 계신다. 성운이가 학교에 혼자 올 수 없고 아프기도 하니까 성운이 어머니와 내가 자주 만나고 교감하는 때가 빈번하지만 다른 학생들이 혹여나 소외감 느끼고 비교를 할까봐 어머니께는 늘 거리를 두었고, 들에서 꺾어온 억새와 들국화 한 송이도 매몰차게 대했던 나다. 그래도 그 필통만큼은 거절하기가 목이 메여왔다. 대신 성운이가 좋아할 만한 고양이 필통을 만들어서 생일에 맞춰 우편으로 보냈다. 

  성운이 어머니는 나보다 더 성운이에게 서운하실 테다. 남들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때리기도 하고 밀치기도 한다. 그래도 늘 성운이를 이해하고 나를 먼저 응원하신다. 해외 봉사를 마치고 복직한 달에 어머니께서 녹음파일을 보내오셨다. 카카오톡을 하지 않는 나에게 메일 계정도 없는 어머니께서 지인의 카카오톡으로 파일을 전하고 제3자가 내 메일로 파일을 보내줘서야 들어본 파일은, 불러주려고 배우셨다는 오카리나로 ‘스승의 은혜’를 연주하신 곡이었다. 다시 시작하는 그 맘이 두렵거나 어렵더라도, 성운이랑 지냈던 그 맘과 추억을 잊지 말고 그렇게 있어달라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보태오셨다. 


  오늘처럼 가을이 깊게 물든 나뭇잎들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고 길가를 어지럽게 휘날릴 때면 성운이와 성운이 어머니가 생각난다. 찬바람 맞으며 둘이 손을 꼭 잡고 걷는 그 뒷모습은, 내가 교실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선생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갑게 비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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