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발가락이 닮았다』]

정신승리 중입니다!

by 운옥

최근에 날 위해서 뭐 하나 좋은 일을 하고 싶어서 새로 시작한 것이 있다.

부담은 되지 않으면서 내게 도움이 될 만한 것으로 찾다가 선택한 것이 바로 영어 문장을 외워서 필사하는 것이다.

A4 용지 2/3 정도 분량의 영어로 작성된 짧은 글들을 선정한 후 문장을 외워서 그대로 베껴 쓰는 단순한 일이다.

처음에는 뭔가를 외운다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라 버벅되고 시간도 1시간은 족히 걸렸던 것 같다.


아무래도 문장을 조금 더 쉽게 외우기 위해서는 글의 전체 내용과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편하다 보니 글을 읽을 수밖에 없었고, 글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 글 자체가 상당히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글의 주제는 ‘당연한 말씀 감사합니다’ 수준의 것들이지만 그 당연한 것을 주장하기 위해 덧붙이는 이유들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다 납득이 가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가 하겠다고 했지만 막상 책상에 앉기까지 수십 번 고민하던 것을 지금은 ‘오늘은 무슨 글일까’ 생각하며 하기 싫은 마음을 다잡고 내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미끼 같은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근데 어느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이게 뭔지? 뭔가 익숙한데….’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내가 하기는 싫은데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으면 지금과 똑같은 방식을 적용했던 것이다.

해야 하는 일 그 자체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로 어떻게든 하게 하는 방식.


중고등학교 때는 수학이었다.

사실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수학 공부를 할 때 찾은 작은 재미는 그날 내가 수학 공부를 하면서 연습장 몇 장을 빽빽하게 채웠는지였다.

참 이게 맞나 싶지만, 당시 나는 오늘 내가 푼 문제들을 모두 완벽하게 이해했는지가 아니라 연습장을 몇 장이나 사용했는지를 보며 내 자신을 대견해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취업 시험공부였다.

취업을 위해 특정 시험을 준비했었는데, 해당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기초 통계학, 경제학 개론 정도의 지식,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글을 접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참 웃프게도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들 대부분이 이때 시험을 준비하면서 접한 것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 자신이 너무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해야겠고, 재미는 없고, 그래도 해야 하니, 뭔가 그 안에서 내 나름의 재미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어떻게든 그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려고 노력한 것이었고, 지금의 나도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님에도 나와의 약속을 완수하기 위해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한국 단편 소설『발가락이 닮았다』가 생각났다.

이 소설은 내가 중학교 때 읽은 것 같은데, 그때도 글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참 용쓴다, 어떻게든 살려고 정신승리하는구나 생각했다.

근데 내가 하기 싫은 일 하면서 이 일을 하는 이유를 찾아내는 것을 보니, 나도 이 소설의 주인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정신승리하고 있구나.’


근데 어쩔 수 없다.

난 오늘도 정신승리하고 있다.

오늘의 정신승리로 내가 조금이라도 영어실력이 퇴보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참고로 난 내일도 정신승리를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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