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때 누군가 맥주를 먹겠다고 하자 어떤 선배가 그랬다.
아니 대학에서 누가 맥주를 마셔?
감히 어디서 맥주를 시키냐는 듯한, 사실 가격은 그리 차이 안 났을 텐데 대학에서는 그냥 소주였다.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라 그냥 그땐 그랬다. 다 소주를 마셨고, 그게 당연했다.
시간이 흘러 직장인이 되니 소주 외의 선택지가 많았다. 특히 복분자주를 처음 먹었을 때의 충격은 가히 대단했는데, 진한 바디감의 단맛은 마치 시멘트로 포장한 소주의 터널을 빠져나와 고급 아스팔트의 자동차 전용도로를 질주하는 느낌의 목 넘김이랄까.
직장인이 된 후 소주란 회식자리에서 피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함께 짠한 정도이지, 먹고 싶어서 먹은 적은 없었다.
소주는 내 인생이라는 박물관의 '20대 초반' 구획의 저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쌓여가던 물품 중 하나가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근무하던 회사에서 내가 있던 사무실만 이사해야 했는데 이사업체가 워낙 날림으로 일을 해서 대부분의 정리를 직원들이 직접 해야 했다.
일하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이삿짐까지 정리하려니 짜증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어쨌든 이삿날이긴 하니 다 같이 점심식사는 법카로 중식을 시켜 먹었다.
어지간히 힘들었던지 부서장이 막내사원에게 빨간색 소주 한 병만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고 부서원들이 모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종이컵에 약 2센티 정도씩 빨간색 소주를 따라서 나눠 마셨다.
'아 나 소주 안 좋아하는데..' 했지만 만면에 영업미소 띠며 "다들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고 짠!
그런데 달았다.
달다..!!
빨간색 소주가 달았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 꽤나 많은 양의 소주를 마셔왔는데 달다고 느낀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이토록 짜릿하게 달짝지근한 첫 경험이라니.
소주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설탕이 들어간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사무실 이사로 몸의 근육은 빧빧하게 뭉쳐가는데 달달한 빨간색 소주의 당분이 혀 끝을 풀리게 하는 느낌.
가끔씩 소주 마시며 '달다, 달아!'를 말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갔는데, 소주가 달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후 밥과 고기, 그리고 술 마시며 일하는 근무의 연장선인 회식 자리에서 다시 마주한 소주는 맛없었다. 달지 않았다.
오랫동안 소주의 단맛을 느끼지 못했다. 마시는 행위 자체가 노동이었다.
시간이 흘러, 건강보험 지역가입자가 되고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시기가 이어졌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아무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스스로 일을 좋아했고, 거기에 빠져 살았기 때문에 일과 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었거나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퍽이나 혐오했었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젠틀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실상 속에서는 세상 가장 밑바닥 언어를 끝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일 잘하는 게 착한 줄 알았는데, 낙오자가 되고서야 알았다. 난 그리 착하지도 않았다는 걸.
벼락같이 찾아와 순식간에 나를 잠식한 우울증은 신체적 통증도 동반하여 얼굴을 칼로 찢는 고통과 절대 손이 닿지 않는 날개뼈 저 안쪽에 누군가 못을 박는 아픔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진통제를 먹으면서도 회사에 출근했더니 어느 순간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글자를 읽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렀을 때 눈앞에 휴직신청서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합법적으로 트랙을 떠났다.
얼마나 집에 누워있었을까.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빨리 흘렀다. 아무도 없는 시간의 연속이 무거워 이리저리 유튜브를 돌리다 발견한 입 짧은 헷님의 비빔밥 먹방에서 그녀가 그랬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봤는데 소주에 비빔밥 먹는 게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모른다고. 그래서 오늘은 비빔밥에 소주라고 했다.
한 번도 그 조합을 시도해 본 적도 없고, 생각도 안 해봤는데 먹고 싶어졌다. 게다가 드라마 김삼순은 아예 본 적도 없는데.
주섬주섬 일어나 뒤져보니 얼추 채소, 밥, 달걀, 고추장 다 있어서 재료 부실 비빔밥은 대충 만들 수 있는데 소주가 없길래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소주 한 병을 사 왔다. 소주 '내돈내산'의 첫 경험!
빨간 참이슬은 아직 무리라는 생각에 선택한 참이슬 프레쉬.
비빔밥의 화룡점정 달걀 프라이까지 다 완성해서 올려놓고 참이슬을 땄다.
드디어 첫 잔.
꼴꼴꼴~하는 맑고 고운 소리.
예전에 즐겨보던 요리 유튜버가 그랬다.
소주의 첫 잔 소리는 벨소리로 만들어서 배포해야 한다고.
과연 아름다운 소리.
비빔밥을 뜨기 전, 살짝 한 모금을 마셔본다.
달콤하다.
내 안의 피가 돌아 체온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웅크림을 해체하는데 이만한 게 없었다.
소주의 맛은 그냥 단맛이 아니었다.
달콤하고 따뜻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