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했던 40대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문서 작업에 더 이상 허덕이지 않아도 되고, 실무에서 벗어나 미팅과 회의, 외근을 주 업무로 하며 성과는 아랫사람 부리기와 윗사람에게 싹싹하기로 측정되는, 근무 시간 중에 업무 외의 것을 주로 하는 관리자들 중 하나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어쩌다 보니 조기 은퇴 후 자발적 저소득자가 되었다.
불안정하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인 시간을 보내며, 4대 보험의 세계를 떠났어도 어떻게든 인생은 살아진다.
찬바람 불기 시작하니 연말 정산을 슬슬 얘기하는 주위 사람들을 보며 새삼 내 머리는 연말정산을 잊은 지 오래임을 인식한다.
인생의 3분의 1을 직장인으로 살았고, 어딘가에 직업을 적어야 할 때면 늘 마케터라 적었다.
어떤 배우가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늘 직업에 학생이라고 적었다가 이제야 배우라고 적는다며 기분이 묘하다고 하던 글이 생각난다.
남이 보기엔 그냥 직장인, 하지만 그 직장인 중에서도 별도로 불릴 이름이 있는 그 유니크함의 자부심.
나만 알더라도, 그래서 나를 지켜주던 자존심.
그렇게 사랑했던 일에 대한 미련은 아직 머리를 떠나지 않았는지 여전히 새로운 브랜드를 보고 물건을 보면 머릿속에 10장 미만의 피피티가 그려진다.
이건 직업병도 아니고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일까?
직장생활 전혀 그립지 않다고 하도 말해서, 오히려 반어법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불러일으킬 것 같은데 정말이다. 그립지 않다.
여전히 사무실을 보면 숨이 막히고, 네모난 책상이 줄지어 있는 것만 봐도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내게 회사란 인생에 다시없을 젊음이 그저 얻어맞던, 폭력의 현장으로 각인되었나 보다. 그럼에도 일을 좋아했다. 공간은 싫었지만 그곳에서의 행위를 좋아했다.
그래서 15년을 버틸 수 있었다.
노력한 것도 있고, 스스로에 대한 방어기제에 의한 것도 있어서 지난 15년의 직장생활 여러 부분이 흐려지고 지워지고 왜곡되었다. 또한 미화된 것도 많다.
그래서 더 그립지가 않다. 징글징글하다는 말이 딱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때때로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이 바로 그때 먹던 점심 메뉴 중 압도적으로 맛있던 몇 가지들이다.
15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얼마나 많은 밥을 사 먹었을까?
감정은 거세된, 거래되는 하나의 재화에 불과했던 밥.
그 밥이 직장인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점심시간 후부터 일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 긴 시간 수없이 내 배에 채워 넣었을 음식들 가운데서 여전히 생각나는 것이, 선릉역 뒷골목의 은희네 해장국.
얇은 소고기와 선지, 콩나물과 파가 팍팍 들어간 감칠맛 폭탄의 해장국.
11시 30분에 오픈했는데 12시에 가면 늘 자리가 빽빽했다.
그때도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지금도 거기가 그리울까.
회사와 가까워서 간 것도 있었지만, 정말 맛있어서 갔었다.
그 회사를 그만둘 때 들었던 생각 중 하나가, ‘이제 은희네 해장국 못 먹겠구나..'였다.
직장생활을 정리한 후로 가능하면 강남 지역에 안 가려고 하는데, 그래도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일부러 찾아가서 먹었었다.
하나도 그립지 않은 직장생활 속의 그 맛만 그리워서.
떼로 몰려가서 다 같이 앉을 수 있는 자리 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좋다.
'한 명이요.'라고 얘기하고 자리 잡고 앉아 함께 해장국에 청하 한 병을 곁들일 때도 있다.
보통, 시간은 오후 2시쯤.
회사 다녔다면 점심 먹고 나른해져서 커피 한잔 먹고 시간 참 안 간다고 생각하며 업무 할 시간에 해장국에 술 한잔이라니, 복에 겨웠다.
급히 먹지 않아도 되고, 술도 마셔도 되고, 옆 사람과 속도 맞출 필요도 없고.
그러다 문득 생각난다.
회사는 하나도 안 그리운데, 왜 회사 다닐 때 먹던 이것이 그리울까?
미각은 고통의 기억도 이겨내는 절절함이 있나 보다.
평생 던져내지 못할 것 같던 사람에 의한 여러 폭력의 기억들이 펄펄 끓어 나오는 해장국 열기에는 스러지나 보다.
보이지 않는 흉터를 남긴 시간을 이기는 맛의 기억.
책상 위에 올려놓고 쓰던 직구 페브리즈로도 쉽사리 가라앉지 않던 옷에 밴 해장국 냄새처럼, 강렬한 것.
다행히 은희네 해장국은 선릉역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서울 이곳저곳, 과거와 부딪히지 않아도 되는 곳에도 있었다.
여전히 해장국은 끓고 있고, 차가운 소주와의 콜라보는 환상적이다.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