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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Sep 30. 2021

생리대가 필요한 과거의 나에게

[50편 글쓰기 프로젝트 No.7]

나의 보건위생을 책임져주던 올리브영 순례길


왕복 5시간의 통학거리를 감내하며 겉으로만 ‘여대생’이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기 학내에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자주 들렸고, 봄이면 등록금 인상에 투쟁하자는 대자보가 동아리 신입회원 모집 안내문과 나란히 붙었다. 화장실이나 중앙도서관, 휴게실 벽면 등에는 전공서적을 직거래하려는 학우들의 자그마한 벽보가 붙었고 거기에는 꼭 [자진철거 *월 *일]이 적혀 있었다.


화장품 파우치와 지갑 하나 넣으면 꽉 찰 것 같은 자그마한 MCM 또는 메트로시티 백팩이 유행했고 여대생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거나 갖고 싶던 뷰티 아이템이 랑콤 립글로스였던 때였지만, 나는 종종 살던 지역의 시내 보세 옷가게에서 주는 비닐 쇼핑백에 책을 담고 명동 스트리트 마켓에서 만 원짜리 신발도 한참 고민하며 사서 신던 가난한 여대생이었다.


아르바이트한 돈을 아껴 인터넷 쇼핑몰에서 명품을 조잡하게 흉내 낸 가짜 가죽 가방을 샀었는데, 벽돌 두 개쯤은 넣은 듯 어깨가 빠질듯한 무게였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잘 매고 다녔고 압정으로 뭔가를 부착하는데 써도 될 것 같은 부직포 원단의 코트도 당당하게 잘 입고 다녔다. 내가 너무 뻔뻔하게 입고 다녀서인지 주위 친구들은 내가 그렇게 돈에 쪼들리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고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다. 겉으로나마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캠퍼스의 낭만을 아는 여대생이고 싶었다.


학교를 다니며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고 밥값을 아끼기 위해 밥 대신 교내 자판기의 율무차와 코코아로 배를 채웠음에도 돈은 늘 부족했다. 학교 가기 전 지갑에 천 원짜리 지폐가 한 장이라도 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비상금으로 모아둔 곳을 살펴 채운 후 일기예보 안내번호에 전화 걸어 날씨를 확인한 후 길을 나섰다. 서울 중심에 있는 학교와 내가 사는 곳은 날씨가 달라 꼭 서울 지역의 일기예보 안내번호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일부러 밥을 먹지 않기 위해 시간표를 빽빽이 붙여 짜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며 돈을 아끼는 궁핍함 속에서도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때때로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고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철없이 있는 척을 한번 하면 일주일 정도는 율무차만 먹어야 했다. 참 철없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고달팠던 여대생에게도 소비를 안 할 수 없는 필수품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 반드시 사야 하는 여성용품이었다. 매월 찾아와 매일 5-6개는 써야 하는 여성용품 값은 도저히 아낄 수 없는 부분이라 그날이 반갑지 않았다. 여성용품 값은 왜 이리 비싼지 올리브영을 수시로 들락이며 가장 저렴하게 판매하거나 특가로 할인하는 제품을 찾아보며 제일 쌀 때 꼭 필요한 양만큼만을 사서 썼다. 여자라면 매달 찾아오는 그 시기가 함께 수반되는 통증이나 피로감 보다도 여성용품을 사는데 써야 하는 돈에 더 예민해져 불편했다.


학교 도서관 앞에는 매주 월요일마다 대학내일이 배부되었다. 대학생이라면 모르는  없는 무가 주간지 었는데,  대학내일 페이지 가운데쯤에  여성용품이 출시한  얼마   기념 프로모션으로, 전면 광고의 오른쪽 하단 귀퉁이에 있는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쿠폰을 잘라오면 올리브영에서 여성용품 2개입 1세트를 무료로 주는 프로모션이 있었다. 월요일이 되면 학교에 가서 대학내일부터 챙겨 강의실에 앉아 표지부터 끝장까지 읽던 나를 보고 친구들은 대학내일 명예대사라고 했지만, 내가 그토록 대학내일을 붙잡고 정독했던 이유  하나는 바로 그런 쿠폰 광고였다. 때로 아무도 영화를   시간대의 특가 영화 티켓 할인 쿠폰도 있었다.


학우들이 뜸한 시간에 대학내일이 쌓인 교내 곳곳을 급습하여 신속 정확하게 여성용품 전면 광고 페이지를 찾아 그 부분만 잘라왔다. 당시 교내의 3-4곳 정도에 대학내일이 배부되었는데 서있는 상태로 쌓인 잡지의 그 부분만을 찾아 잘라내는 것은 사실상 어려워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다가 잡지를 본다는 듯이 어슬렁거리며 접근해서 재빠르게 한 부를 집어 들고 더 재빠른 속도로 쿠폰 페이지를 찾은 후 깔끔하지는 못하지만 예리하게 그 부분만 찢어내어 주머니에 넣고 근처를 조금 배회하다가 다시 가서 그 작업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꽤 시간이 들고 눈치가 보여 1회 작업 시마다 많아야 3번 정도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모은 쿠폰을 들고 광화문부터 종로 3가까지 이어지는 길에 있는 올리브영을 하나씩 들르며 여성용품으로 바꿔갔다. 한 곳만 가면 티가 나니까 일부러 한 곳씩 순회 방문을 한 것이었다. 워낙 매주마다 가다 보니 혹시나 알아볼까 싶어 모자를 쓸 때도 있었다. 다행히도 그 쿠폰 프로모션은 상당기간 했었다. 그렇게 월요일마다 나의 보건위생 생활을 책임져주던 대학내일의 쿠폰을 챙겨 올리브영을 순회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바로 그날, 마지막으로 방문한 종로 3가 올리브영에서 쿠폰을 내밀면 공짜로 주는 그 여성용품을 종이봉투에 담아 2개가 아닌 6개를 주었다. 당연히 2개만 담아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흠칫 놀랐지만 모르는척하고 태연하게 '감사합니다.' 하고 나왔다. 2개가 아닌 6개라니. 이런 득템이 있나 싶어 두근두근했다.


그날 내게 여성용품을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준 사람은 내가 쿠폰을 바꾸어 갈 때마다 봤던 여직원임을 나가는 길에 알아보았다. 다른 올리브영에서는 쿠폰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니 별도 포장 없이 그대로 2개를 건네주는 곳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봉투에 담아서 4개나 더 챙겨주었다. 그 순간 귓가에 그 음악이 들려왔다. 초코파이의 광고 음악의 그 멜로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돈이 정말 지독히도 없던 시기라 세상에 긍정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생각과 가치관이 가득한 염세주의 여대생이던 내가 20대 시절을 회상할 때 손에 꼽는, 사람에 감동받았던 순간 하나가 바로 그 때다.


당근 마켓에서 생활이 어려운 여학생을 위해 생리대를 무료 나눔 하겠다는 글을 보았다. 받으러 올 때 교복 차림이어야 하고 학생증 확인한 후 주겠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그 정도는 최소한의 검증을 위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광화문부터 종로 3가까지 쿠폰으로 생리대를 교환받기 위해 올리브영에 립스틱이나 립글로스를 테스트하러 들렀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능청을 떨며 '아 맞다. 쿠폰으로 이거 받을 수 있다던데?' 하는 정말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하며 생리대를 바꿔가던 스물몇 살의 내가 떠올랐다. 생리대 사는 돈이 아까워 달마다 찾아오는 젊은 여자로서의 일주일을 달가워하지 않던 나의 20대.


가끔씩 심한 스트레스와 아르바이트 강행군 탓인지 그 일주일이 찾아오지 않을 때면 건강 걱정보다도 이번 달은 돈이 굳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매주마다 다른 학우들의 쿠폰 기회를 몰래 도둑질하던 그때.


창피는 뒤로 젖힐 수 있던 뻔뻔한 빈곤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오늘. 지금도 어디선가 그때의 나처럼 한 달에 한번 찾아오는 그 시간이 그저 불편하고 달갑지 않을 소녀들에게 나의 부채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뒤늦게 찾아본다.


분명히 존재했던 한 때의 나를 망각하고 있던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가장 믿을만해 보이는 단체를 찾고 약간의 돈을 입금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앞으로는 매달 보낼게.


출처: https://happybean.naver.com/donations/H000000180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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