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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Jan 12. 2022

나를 사랑하지 않던 그대에게

2016년 도쿄 여행의 먼 기억에 부쳐

오랜만에 블로그 글들을 정리하다가 2016년 봄, 회사 사정으로 밤샘 근무를 3일간 한 후 3일간의 유급휴가를 받아 계획 없이 떠난 도쿄 여행의 글을 발견했다.


그때의 나는 그 3일간의 도쿄 여행을  스스로 표현하기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를 잊기 위해 떠난 여행’이라 적었다. 그 여행길에서 혼자 도쿄도청 전망대에 올라 서울과는 분명히 다른 도쿄의 야경을 보며 나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곳에서의 짜릿한 외로움을 만끽했다. 내가 지금 이 전망대에서 투신 한다한들 나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곳이라는 극한의 고립감이 주는 절정의 자유감이었다.

그 여행은 사실 2015년 가을의 일이 전초가 되어 시작된 것이었다.


이제는 날짜도 기억나지 않는 2015년의 그날. 선선한 바람과 맑은 하늘의 전형적인 가을의 하루. 출근 후 믹스 커피 한잔을 타서 책상에 올려놓고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날아온 바늘 한 다발 같은 카카오 메시지 하나.


‘###씨 여자 친구이신가요? @@@에서 ###씨와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이 과장이나 거짓이 아님을, 온몸의 피가 다 쏟아지는 느낌이라는 표현 역시도 그러함을 처음 알게 되었다.


꽤 긴 시간,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내편이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가 해외에 취업이 되어 떠날 때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그 해외 취업을 장려하고 응원하며 밀어붙였던 것은 나였다. 함께의 삶을 그려가기에 그의 급여는 너무 작았고, 비빌 언덕이라고는 하나 없던 그의 배경이 안쓰러워 내가 먼저 제안했던 것이었다.  그가 해외로 가면 나는 한국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 1-2년 안에 합치자는 것이 계획의 개요였고 그가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떠난 후 정말 열심히 돈을 벌고 모았다.


그의 출국이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긴 시간 옆에 있던 그의 존재가 잠시 부재함이 주는 해방감도 있었다. 하지만 출국 후 9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이젠 내가 갑, 네가 을’이라는 태도로 일관했고 그런 변화가 그저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다시 출국하기 전날에서야 여자가 있고, 무엇을 했고, 어떤 사람이고를 어쩔 수 없이 내게 털어놓았고 다 들은 나는 ‘정신 차리고 제 자리로 돌아와라. 지금 당신의 태도는 어린아이가 갑자기 화려한 놀이동산에 가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 관계에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자.’라고 말하며 담담한 연기를 했지만 이미 내 속의 많은 것들이 쾌속 부패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온 세상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있었으나 없었던 일이 될 것이라는 매우 어리석은 믿음으로 버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와 나의 삶을 살아가면 언젠가 흐려지고 옅어져 기억 속 저 너머의 어딘가에 먼지로 뒤덮여 그저 하나의 굴곡 같은 형태로만 남을 것이라 굳게 믿으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얄팍한 마음 술수이며 정신승리에 불과함 역시도 알고 있었다.


2016년 봄의 도쿄의 야경을 나의 시신경에 새겨 넣을 때 온몸의 세포가 일어나 ‘나는 진정 혼자다.’를 환기시키며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존재, 당시 내가 느끼고 있던 감정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취한 것에 불과한 정신착란인지 그렇게 처절하게 일러줬건만 온전히 나를 되찾기까지 꽤 긴 시간을 허비했다.


이제 6년이 넘게 지났고, 인생의 한 장을 차지하는 존재라 생각했던 그와의 기억은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끄집어내지 않고서는 쉽게 회상되지가 않는다. 마치 ‘어디에 뒀더라?’ 하고 한참 생각하다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이곳저곳 떠들어봐야 찾아지는 7년 전 백화점에서 사서 몇 번 입고 넣어둔 티셔츠 같은 느낌이 되었다. '그래도 백화점에서 샀는데..' 하며 아까워 꿍쳐두고 있지만 머지않아 그 티셔츠를 굳이 찾아내어 의류수거함에 넣어 영원히 작별하는 날이 올 것이다.


코로나가 물러나면 다시 도쿄에 가서 도쿄도청 전망대에 오르리라. 그리고 또 생각하리라.

‘내가 아니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이여. 다시는 마주치지말자.’

BGM: 다시는 마주치지말자 (Artist 장혜진)


2016년 봄. 도쿄도청 전망대에서 절대고독의 쾌감으로 바라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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