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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Feb 14. 2022

커피향을 타고 오는 나의 민주주의, 나의 자유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의 기자가 해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본 북한 외교관에 대한 글을 기억한다.


남한의 기자로 만난 북한 외교관은 예상과 다르게 그저 우리의 체제가 최고라 말하지 않았고 서로의 입장 차이를 매우 합리적인 논조의 수준 높은 영어로 펼쳐 보이며 은둔의 나라에서 온 엘리트에게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세계 각국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본 북한 사람, 게다가 북한의 엘리트. 그저 신기한 눈으로 그를 살폈는데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지나가고 혼자가 된 그는 텅 빈 회의장에 혼자 앉아 커피를 아주 맛있게 마셨다고 한다. 한 모금이 매우 소중하다는 듯 아주 맛있게 음미하면서.


그 모습을 차마 방해할 수 없던 남한 기자는 그를 바라보며 아침 출근길의 복잡함을 벗어나 사무실로 들어갈 때 ‘일단 커피 한잔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소함이 누군가에게는 놓치고 싶지 않은 절실한 행복이자 가장 강렬한 자유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숨 막히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에 뒤엉켜 쏟아지듯 역에 내려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하며 ‘일단 들어가면 커피부터 한잔 먹자.’라는 생각을 할 때 커피 한 모금을 절실하게 맛보았다는 북한 외교관을 떠올린다. 지하철역에서 사무실까지 걸으며 오늘은 어떤 커피를 먹을지 생각하다 사무실에서 미리 생각해뒀던 커피를 한잔 마시는 그 순간이 곧 내가 매일 마주하는 자유이며, 민주주의다.


해외여행을 다닐 때마다 내가 남한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곤 했다. 지금은 자유로운 해외여행이란 다시 만날 수 없는 지난 사랑 같은 느낌이라 그 축복을 체감하기가 전 같지는 않지만 최근 들려오는 우크라이나 전쟁 임박 같은 비극이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끝없이 살해당하고 핍박당하는 이슬람 국가 소식을 접할 때, 동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 단지 이곳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온, 이토록 비대칭적 기본권의 현실에 미안함이 섞인 안도를 느낀다.


일종의 정서적 테러에 가까운 정치 뉴스가 쏟아지는 요즘이다. 짜증과 스트레스의 근원이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싶을 정도로 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도해야 함을 지독한 현재진행형으로 경험했기에 의무감을 담아 읽고, 보며 생각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때로 피와 땀냄새에 젖어오기도 하지만 때로 고개가 돌아갈 정도의 악취도 흠뻑 머금고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아침마다 믿기 어려운 뉴스들이 쏟아져 나왔던 시절이 있었다. 스마트폰 수출하고 올림픽과 월드컵도 다 치른, 한걸음만 내딛으면 선진국이 되리라 기대하는 내 조국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지 의심스러우면서도 하도 해괴해서 계속 보게 되는 그런 소식들.


그 시기, 뉴스는 버라이어티였고 엔터테인먼트였다. 사람들은 개콘을 보고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투표한다. 혁명 같은 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매일 아침 사무실 가서 무슨 커피 먹을지 생각하는 별 것 아닌 소소한 의사결정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나의 소소한 일상이 해괴하고 망측하며 악취 나는 세태로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게 투표란, 청정 일상 사수 궐기 대회다.


내일은 오랜만에 노란색 맥심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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