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없어도 되는 삶: 무례했고, 무능했던 상사님들 덕분입니다.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회사의 순위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단연코 1위는 가족회사이다.
가장 사적인 관계인 가족의 삶이 가장 공적인 공간인 일터로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일과 생활의 분리가 모호하며, 피붙이가 최고이다 보니 누구도 믿지 않고 달라지는 세상에 대한 적응이 매우 비효율적이고 피상적일 뿐 아니라 가족 간의 불화는 곧 경영위기, 정당하고 객관적 평가에 의한 인사관리는 애초에 기대해서는 안되는 곳.
대학교 졸업 후 가족 회사에서 본격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하는 멋지고 순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생활 내내 돈이 없어 골골거렸던 것이 한스럽고 지긋지긋해서 돈을 많이 준다고 소문난 은행과 항공사 채용을 줄기차게 두드렸지만, 그 문은 열리지 않았다.
취업의 문 앞에서 번번이 좌절했고, 당시 수입은 중학생을 과외해서 받는 30만 원이 전부였다.
30만 원으로 취업준비를 위해 공부를 하고 생활을 하며 취업준비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서울 시내까지 나가는 것이 2시간 이상 걸리는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취업 스터디를 하러 가는 것도, 면접을 보러 가는 것은 물론 면접 의상과 메이크업을 준비하는 모든 것이 부담이었다.
항공사에 입사하여 유니폼을 입고 캐리어를 끌며 살인의 추억에 나올 것 같은 흉흉하고 으슥한 집 앞 골목에 들어서는 상상을 만 번 정도 하며, 10번까지만 도전해 보고 그만두자 결심했던 항공사 채용 시험의 6번째 탈락을 끝으로 기업의 홈페이지 속 채용 메뉴가 아니라 잡코리아와 사람인을 뒤적이며 하루 20곳씩 지원하기에 도전했다.
더 이상 취업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기에는 다급했고, 돈은 없었다.
그렇게 수없이 이력서를 뿌린 끝에 연락이 온 2곳의 회사.
한 곳은 뮤지컬 기획사였고, 한 곳은 약간 비싼 수입 명품 구두 유통사였다.
만화가 원작인 뮤지컬을 무대에 올렸던 첫 번째 회사에서는 내게 작품을 보고 의사결정을 하라고 하여 공짜로 뮤지컬 공연을 한번 보았다. 돈 한 푼 없던 학생시절에도 종종 돈을 아껴 뮤지컬을 보던 나였기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 길은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재미는 있겠지만 돈은 못 벌 것이라는.
그때의 나는 인생의 재미보다 돈이 급했다. 빚쟁이만큼이나 두려운 생계가 머리끝을 움켜쥐려 할딱이며 뛰어오는 숨소리가 들리던 때였다.
더 이상 배고프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허기를 청춘으로 채우기에는 빛난 적 없던 스물다섯이었다.
두 번째 면접을 본 수입 명품 구두 유통사의 위치는 가로수길이었다.
서울 가운데에 위치한 학교까지 왕복 5시간의 거리를 통학해야 했던 촌년 취준생의 눈에 가로수길이라는 위치만으로도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직무는 홍보. 신입을 뽑지 않는 자리임에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가득한 패기, 특히 대학교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으면서도 장학금을 받고, 졸업까지 500권에 가까운 책을 읽었다는 부분이 매우 마음에 들어 면접 기회를 줬다며 신입인데 경력처럼 잘할 수 있겠냐고 여러 번 물었다.
직원이라고는 대표, 이사 제외하고 2명뿐이던 작은 곳이었지만 작게 시작해서 크게 크면 된다는 헛된 희망을 어디서 배웠는지 나는 일당백을 해 보이겠다며 잔망스러운 자신감을 보였고 그곳에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월급은 백만 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이름 들어본 회사의 공채를 포기한 인서울 4년제 졸업생에게 매겨진 현실적 가치였다.
수입 명품을 홍보하는 사람의 차림새가 추레하다며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혜수가 커트하는 곳이라는, 커트 한 번에 8만 원이었던 곳에 데려가 머리를 자르게 했다.
싫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어쨌든 홍보녀의 삶을 살게 되었고, 브랜드도 명품이다.
촌년에게 온 기회였다.
가족회사였고, 머리를 자르게 했고, 월급은 작았지만 홍보담당이 되었다.
문과 졸업생이 할 수 있는 제한적인 직무 중 홍보는 가장 근사해 보이던 것이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도 처음은 다 서러웠고, 성공을 위해 자리 잡아가며 다 거치는 시간이라 생각했기에 힘들지도, 괴롭지도 않았고 일단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회사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회사였다.
기독교 재단의 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교회 문화에 크게 거부감이 없었던 나였지만, 주 6일 근무를 마치고 단 하루 쉬는 일요일에 교회를 갔다 왔는지를 월요일 아침마다 확인하고 전 직원이 신앙 고백을 해야 하는 시간은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근무한 지 두 달도 안되었던 시점, 그 주에 경험한 신앙 이야기를 이야기를 하던 날.
지하철에서 마이크를 들고 노방전도를 하는 분들을 보면 오히려 반감이 드는데,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잘 사는 것이 최고의 전도라 생각한다는 말을 했고 순간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감지했지만, 문제라는 생각을 못했다. 둔했다.
그 회사는 점심을 직원들이 직접 만들어 먹었었는데, 식사 중 녹차를 마시는 내게 권사님 겸 대표님이 말씀하셨다.
아니 이런 걸 너만 먹니?
무릇 웃어른한테 먼저 드려야지?
탕비실에 있어서 먹었는데
제가 한잔 타드릴게요.
됐다.
드시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하며 다시 밥 먹기에 집중하는 내게 그분의 지적이 이어졌다.
넌 젓가락질이 이게 뭐니?
내가 대학 시절에 어디 가서 밥을 먹는데
친구 어머니가 젓가락질을 지적해서
그 후로 싹 바꿨다.
아 네.. 전 이게 편해서요.
그때는 배가 고파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일단 밥을 먹었고 약간의 날짜들이 지났다.
신앙 고백으로 시작하는 월요일 조회, 권사님 겸 대표님과 그분의 따님이자 집사님이시며 이사님이신 분이 오시지 않았다.
올망졸망 3명의 직원들이 조회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가는 순간 이사님의 전화가 왔고, 가장 선배였던 언니가 전화를 받고는 내게 이사님을 근처 커피빈에서 잠깐 만나고 오라고 했다.
커피빈에서 만난 이사님이 말했다.
넌 우리랑 안 맞는 것 같아.
네가 갈 곳을 내가 찾아봤는데 가서 면접을 보고
거기가 결정될 때까지 출근해도 돼.
월급은 줄게.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지 나와도 되고 월급도 챙겨주겠다는 말에 해고의 황망함보다도 일단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던, 자존심을 찾을 수 없던 빈털터리었다.
그날 오후 바로 나의 후임자가 왔고 책상을 내어 주었다.
할 일 없이 한 달 가까이를 뻔뻔히 출근했다. 작은 소형 프린터기가 놓인 책상의 빈 공간, 폭이 30센티도 되지 않는 그 자리에서 등받이 없는 의자를 두고 앉아 있었다.
민망함과 모멸감이 원을 그리듯 찾아오던 시간이었지만 내일부터는 그냥 안 나오겠다는 말을 할 용기도 없었고, 한 푼이 아쉽던 터라 이면지를 정리하고 과월호 잡지에서 조금이라도 회사와 연관성이 있는 기사를 잘라 스크랩하며 시간을 보냈다.
근무한 지 두 달도 안된 생 초짜의 나에게서 인수인계도 배울 것도 없던 경력직의 후임은 극도의 멸시와 혐오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자연스레 직원들의 점심시간의 뒤치다꺼리는 내 차지였다. 그것이라도 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한 첫 직장생활은 순식간에 가사도우미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자존심과 자존감을 지하의 세계로 끌어내렸다.
출근하면 청소하고 이면지를 정리하며 과월호 잡지를 끝없이 보던 어느 날, 월급 70만 원의 홍보대행사 인턴 자리에 채용이 되었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날, 매장의 판매사원도 그만두었고 그녀의 송별회에 나도 끼게 되었다.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던 시간. 공간과의 이별임에도 기쁘다기보다 앞이 보이지 않아 그저 답답했다.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깜깜한 고속도로에 놓인 무보험 차량에 불과했다. 견인도, 긴급주유도 기대할 수 없었다.
길지 않은 기간, 급속도로 기가 죽고 쪼그라든 내게 권사님이자 대표님은 말씀하셨다.
고분고분하게 살아라. 넌 너무 세다.
그분의 젓가락질 지적 후로, 그곳에서의 모든 식사 시간에서 젓가락질을 하지 않고 밥을 먹고 있었다.
다행히 마지막 식사는 파스타였다.
그 후로 16년이 지난 지금, 젓가락질은 그대로이며 밥만 잘 먹고 산다.
나는 소문난 밥순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