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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Oct 05. 2023

구내식당, 그 엄청난 존재감에 대하여

이름을 밝히면 누구나 알법한 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복지 잘된 회사에 다니는 이들의 월급 외 혜택에서의 결핍 없는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간 경험한 최고 수준의 사내 복지는 외국어 학습비 월 10만 원 지원이었다. 매월 출석률 80% 이상을 증빙해야 하는 이 제도를 활용하는 이는 사내에서도 3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입사한 달부터 매월, 일 년 가까이 전화영어 수강료에 대한 회사 지원을 받기 위해 결재를 올릴 때마다 '우리 회사에 이런 제도가 있었나? 세상 좋아.'를 다 들리는 혼잣말로 말하는 직속 상사 앞에서 늘 작아졌다. 


내가 받아가는 매월 10만 원의 영어 학습 수강료를 두고 단 한 번도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한 마디씩 하며 결재 서명을 해주던 직속 상사는 S가 두 개 들어간 회사를 다니며 회사 지원으로 미국 MBA까지 마쳤던 사람이었다. 


자신은 최고의 직장에서 최상의 복지를 누리며 커리어를 성장시켜도 하등 문제가 없었지만, 하위 계층의 사람은 알량한 영어실력 높여보겠다며 10만 원도 받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무식한 것들이라고 천대하던 머슴이 무식을 벗어나겠다며 천자문 공부할 테니 세경 좀 더 줍쇼할 때의 떫떠름한 기분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영어권 유학경험이 없는 나를 두고 중학교 영어를 구사한다며 대놓고 무시했기에 외국어 학습 지원 결재 서류의 항목에 '영어 학습'이라고 적힌 것을 볼 때마다 묘하게 피식 웃었다.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은 부지런한 비웃음이었다.


멸시로 가득 찬 눈총을 받으며 직속 상사의 서명을 받고, 그다음 단계의 높으신 분 서명을 받으러 가면 그분 역시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심히 불편해 보이는 주걱턱을 만들며 결재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그리 적힌 것도 없는데 3분 가까이 뚫어져라 샅샅이 서류를 살펴보는 더 높으신 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색함에 손을 맞잡은 채 꼼지락 거리는 것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매달 외국어 학습 지원 서류에 서명을 받으러 갈 때마다 늘 주걱턱을 만들고 3분 이상 서류를 훑어보던 일련의 결재 프로세스가 몇 차례 반복되었을 즈음 그분은 서명한 서류를 돌려준 직후, 실력 향상 검증 없이 지원만 해주는 게 맞냐며 인사팀장 수신으로 참조에 전 직원을 넣어 메일을 보내셨다.


다음날 인사팀장은 나를 불러 토익시험이라도 한번 보고 오라고 했고, 내가 듣는 수업은 영어회화 목적이지 토익수업이 아니라는 답에 그런 상황은 모두 알지만 일단은 형식으로라도 가져오라고 했다.


다시는 외국어 학습 지원을 청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사내 복지는 끝났고 회사의 외국어 학습 지원 신청자 수는 빛나는 0을 기록했다.


대통령이 4번 바뀌는 동안의 시간이 흐른 사회생활을 반추해 보면 최고의 복지는 돈 또는 야근 없는 삶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돈도 적은데 야근 있는 삶을 주로 살았다.


대학 졸업 후 애초에 대기업에 가지 못하면 다른 경로로 그 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대학 일반편입 이상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근사한 공간에서 만족스러운 복지와 연봉을 받으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그런 곳에 나를 가져다 놓았어야 했다. 


가장 최근 퇴사한 회사의 복지는 자사 제품을 정상가의 20%에 살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인을 적용해도 싸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씩 선물용으로 샀는데 어느 날 내게 대표가 물었다.


왜 사서 쓰지 않는가? 제품을 좋아는 하는가?
사기 힘들면 말해라. 주겠다.

휴가 없고, 주말이든 휴일이든 새벽이든 시도 때도 없이 업무 단톡방이 울려대던 곳이었으나 유일한 장점이던 재택근무 병행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내 마음의 온도계가 폭발했다.


다음날 퇴사의사를 밝혔다.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할 때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곳에서의 손길이 나를 불렀다. 건강의 이유로 반드시 재택근무를 병행해야 하는 나의 희망 조건이 받아들여졌고, 사무실 출근은 이전보다 더 많은 조건이었지만 수락했다. 

                

꾹꾹 눌러 담다 내 안의 온도와 압력을 못 견디고 터져버린 내면의 온도계 조각들을 빠르게 배출시키는 방법은 새로운 곳으로의 도망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달아나듯 새로 온 직장의 첫 출근날, 건물 구경의 마지막 코스는 놀랍게도 구내식당이었다.


밥을 주는 회사!


이 얼마나 정감 가는가!


갓 지은 따끈따끈한 밥과 반찬 4가지, 거기에 국까지!


12시 30분부터 밥이 차려지는데 11시 58분부터 마음이 설렌다.


내 손으로 밥을 해 먹고 산지 언 7년 차.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역시 남이 해준 밥이었다.


밥이 가진 놀라운 힘.


밥을 먹으면 생각이 차분해지고 뭔가 시작하게 한다. 일단 뭐라도 하게 된다.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 진전을 위해, 무언가 일이 안 풀릴 때 밥을 먹자고 한다.


구내식당은 최고의 복지라 일컬을만한 것이었다.


오늘은 생선가스와 미역줄기, 무김치가 특히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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