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정하 Dec 28. 2019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버려야 할 몇 가지

특정 지역에 대한 견고한 이미지 형성

직장생활이라는 것은 몰랐던 세상을 보게 만들고, 이런 종류의 인간도 있구나를 알게 하고 또 얽히게 하며, ‘분노와 환멸’에 대한 넓고도 섬세한 스펙트럼을 환기시켜줬다.


‘화가 난다, 싫다.’라는 표현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매우 복잡한 불쾌함의 감정들을 상당히 자주 마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직장생활.


진리를 찾기 위해 금욕하는 수도승처럼, 그 옛날 귀 닫고 3년, 눈 닫고 3년을 버텨야 한다는 시집살이처럼 ‘버티기’를 해야 하는 것이 직장생활의 정석인지, 아니면 매일 새롭게 자기 계발에 박차를 가하며 내일을 향한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것인지, 직장생활 10년이 지나도 자주 그 고민 앞에 서성인다.


하지만 직장생활로 변화한 나에 대해서는 정리가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내일이 오는 것이 무서워, 잠들면 차라리 눈이 안 떠졌으면 하던 시절. 월급을 받아도 이리 떼고 저리 떼면 20만 원만 주머니에 들어오던 시절. 근로계약서가 뭔지도 모르고 일하다 ‘이번 달까지만 일해.’ 하는 통보 앞에서도 벌벌 떨며 새벽 3시까지 일하던 시절.


4년제 대졸자의 첫 월급은 70만 원이었다. 합격할 때 현수막을 걸 수준의 학교는 아니었지만, 4년간 아름다운 캠퍼스를 거닐며 실컷 책을 볼 수 있었고, 오래된 서울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추억의 학교였고, 학점도 나쁘지 않았다.


연봉 840만 원이 아닌 월급 70만 원이었다. 왜냐면 난 어떤 법적 문서에도 남지 않는, 인턴이라는 번듯한 이름 아래의 머슴이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 시절 이야기 아니고, CEO 대통령을 외치시며, 국밥을 맛깔나게 드시던 분이 대통령이 될 거라는 소리가 세상을 휩쓸던 시기였다. 당연히 4대 보험 없었고, 근로계약서 없었다. 근로계약서가 어떻게 생긴 것이라는 것인지, 그것이 합법적 채용/고용의 시작이라는 것은, 그 첫 사 회생 활로부터 1년도 더 지나서, 영혼만 갈아버리는 게 아니라 내 살까지 갈아버리는 듯한 노동강도의 마케팅 대행사에서 알게 됐다. 하지만, 그 대행사도 첫 근무 시에는 근로계약서가 없었다. 3개월의 수습기간을 통과하면 정직원이 된다고 했지만, 3개월이 끝나는 날, 나를 포함해 같은 날 입사한 3명에게 ‘당신들은 잉여인력’ 이라며 1개월 추가 수습기간을 통보받았다. ‘당장 뛰쳐나갈까. 어쩔까’ 하다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 참고 버텼고, 1개월 후 근로 계약서를 난생 처음 보고, 쓰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근로계약서 2개를 작성해 모두 다 수거했다. 설명은 없었다. 써본 적이 없으니,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미리 인터넷으로라도 찾아봤어야 하는데 그때는 눈뜨면 일하고 눈감으면 자야 하는 머슴 그 자체라 그것을 찾아볼 생각조차 못했다. 물론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다.


회사가 근로계약서에 서명하게 한 후 모두 수거해간 것은, 근로계약서에 적힌 적법한 조건을 근거로 문제제기를 할 ‘싹’을 애초에 없애버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적법 조건, 절차를 알고 있더라도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만약 그 회사에 들어가 당장 돈을 벌어먹고살 수 없다면, 당장 동네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심야 시간의 Bar에 가서 일할 생각이었다. 난 스물다섯이었다. 누구도 날 책임져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당장 매달 돈을 벌어 막아야 할 곳이 있었다.


마케터를 꿈꿨지만, 이런 게 마케팅이라니 하는 놀라움을 매일 영접하던 신입시절이었다. ‘대체 이걸 누가 본다고.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닌가. 나는야 거짓말쟁이’ 하는 자기 물음이 수없이 피어나던 시절이었다. 정신은 억울했고, 몸은 피곤했다. 하지만 그 노곤함도 어느 순간부터 익숙해졌고, 아침에 출근하면 맥심을 한잔 타 먹은 후 캘린더에 할 일을 정리한 후 순서대로 처리해가는 습관이 몸에 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직장생활이 정말 ‘생활’이 되어 온도로 피부에 닿고,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생활은, 이토록 다양한 종들의 인간과 얽히며 살아야 한다는 것.

서울에서 태어나 인생의 긴 기간을 경기도 변두리 지역에서 보내온 나는 특정 지역에 대한 이미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 지역감정이란, 뉴스와 신문, 그리고 학교의 사회시간에서 접하며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지금으로 말하면 적폐와도 같은 것이라 배워왔다.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며 특정 지역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은근하게 형성되는 그곳 출신의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생겨난 것이다.


혹시 이 양반, 그 지역 출신인가? 하면 거의 대부분 맞아떨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수차례 경험하며, 이러다 나도 꼰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 한탄을 하기도 여러 번.

출신 지역으로 사람의 이미지를 몇 가지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에둘러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례하고, 성급한 것인지 듣고 배워 알고 있으면서도, ‘이 죽일 놈의 경험’이 무섭다.


앞서 잠시 소개한 근로계약서 모두 수거해간 회사에서의 팀 회식 날. 단체로 야구를 보러 가기로 했고, 다들 올망졸망 신입이던 그 팀의 팀장(역시 신입)은 단체 채팅방에서 말했다.

‘여러분, 오늘은 *** 시골 떨거지들과 SK와의 경기를 단관 하는 날입니다.’

*** 지역은 나의 어머니의 고향이 있는 곳이라, 내게는 따스한 외가의 이미지가 있는 지역. 그의 언급에 나는 바로 타이핑했다.


‘지금 무슨 그런 몰지각한 지역감정 유발 언행입니까? 사과하세요.’


나의 불꽃같은 반응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가던 팀장에게 ‘왜 무시하시죠? 사과하세요.’라고 다시 쏘아붙이자 ‘미안합니다.’라는 짤막한 말이 채팅창에 떠올랐다.


그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중심 지역 중 하나에서 온 넉넉한 집 아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 처음 목격하고 경험한 ‘지역감정’의 사례였고, 그런 언행을 별생각 없이, 웃긴다고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온 지역에 대한 첫 이미지 형성이었다.


그 후로 세상을 살며 그와 같은 지역의 사람들을 몇 차례 만나게 되었다. 그 정도의 무례한 언사는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지역 출신으로써, 특정 지역에 대해 짙게 배어있는 무시는 느낄 기회가 있었다.


살며 생각한다. 나 역시 누군가의 선입견과 편견을 형성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무례의 기억을 선사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런 의미에서, 서울살이 20년에 가까워오는 지금도 내게 서울 사람이란 ‘깍쟁이’고 서울은 '차갑고 냉정한 도시'이다. 속을 나눌 만한 친구도 없고, 매정하고 억울한 일을 수없이 겪은 서울은 라이프가 아니라 '살이' 그 자체다. '서울 살이'.

선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버텨내고 있는 나의 서울 생활이지만,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생겨나고 이뤄진 곳.  

내년의 서울 생활은 올해보다 0.1도만 더 따뜻하면 좋겠다. 그리고 '특정 지역에 대한 견고한 이미지 형성'은 버려야겠다. 꼰대가 되서는 안되니까! 청춘은 몸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니까!






작가의 이전글 1999년의 심은하는 너무 예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